허지웅의 극장뎐
<7광구>는 시사회 이후의 지적에 따라 전반적인 후반작업을 새롭게 마친 뒤 개봉 당일 오후에 선을 보였다. 이 글은 관객들이 극장에서 보게 될 최종 버전을 감상한 이후 쓴 것임을 밝힌다.
<7광구>는 재앙에 가까운 영화다. <7광구>의 컴퓨터그래픽(CG) 완성도가 예상보다 훌륭하다는 것은 주지할 만한 사실이다. <7광구>의 시지는 밝은 광원 아래에서도 꽤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그뿐이다. 우리는 기술 엑스포에 간 게 아니라 극장에 간 것이다. 112분 분량의 시지 트레일러를 보러 간 게 아니라 우리를 흥분하게 할 만한 무엇인가를 보러 간 것이다. 그러나 <7광구>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아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7광구>는 무슨 이야기냐”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답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허무하고 묘연하다. 이렇다 할 만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의 시지 완성도가 나쁘지 않다는 건 장무기가 의천검과 도룡도를 모두 가지고도 그걸로 길바닥에 “오지호는 하지원을 좋아한대요” 낙서를 휘갈긴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7광구>는 7광구 석유시추선에 심해 괴물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당장 <에이리언>부터 <딥 임팩트> <어비스> <딥 라이징> <딥 블루 씨> <바이러스>, 존 카펜터의 <괴물> 등의 영화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나 <7광구>는 이 가운데 어느 영화의 유의미한 유산조차 계승하려 하지 않는다.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괴수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더불어 “기존 괴수영화에선 괴물을 숨겨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나는 답답했다”고 설명했다. 일단 괴수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괴수영화 감독의 변은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매우 못 만든 공포영화 감독의 술회와 다를 게 없이 무책임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건 일단 논외로 치자. <7광구>의 괴물은 관객을 사로잡을 다른 전략을 겸비한 상황에서야 겨우 가능할 허세를 부리고 있다. 문제는 괴물의 등장 시점과 횟수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드라마가 괴물과 더불어 어떤 파격을 겸비할 수 있느냐다. 이 영화에는 어떤 형태의 서스펜스도 공포도 스릴러 장르의 전략도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도 멍하고 인물들도 멍하고 액션의 합도 멍하다. <죠스>에서 상어가 드러나는 장면이나 <에이리언>에서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 몇 분 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싸이코>에서 노먼 베이츠가 마리온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칼이 살을 찌르는 결정적인 컷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영화들을 ‘무서운’ 작품으로 기억한다. 반면 <7광구>는 괴물을 어떤 영화적 전략을 빌려 보여주느냐 마느냐의 차원과는 무관하게 그냥 ‘방치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루하고 안일한 영화다.
<7광구>의 몰락은 관객의 수준을 어느 기준선 이하에 묶어 두면서 생긴 비극으로 보인다. 한국 관객은 이 영화의 경직된 대사나 <디 워>류 민족주의 낚시질에도 언제나 너그러울, 덜떨어진 사람들인가. 아니, 최소한 <7광구>의 태만함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를테면 안성기와 차예련이 몸싸움을 벌인 이후의 컷들에서 저 둘의 시선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에게 그런 건 별문제가 아닐 것이고, 그냥 말장난에나 신경쓰면 될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확실히 문제가 된다. 대체 관객을 뭐라 생각하는 건가. 심해 생물?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장의 지속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우리는 상당한 규모의 남의 돈을 끌어 쓰는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이런 결과물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는지 검증해봐야만 할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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