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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허지웅의 극장뎐] ‘NO’를 외치고 싶은 게 유인원뿐이랴

등록 2011-08-21 20:26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수작이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제작 시스템이 그 비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합리적인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1968년부터 73년까지 다섯 편에 걸쳐 이어진 원작 <혹성탈출> 시리즈는 에스에프(SF)영화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가운데 하나다. 이런 시리즈를 리메이크한다는 건 매혹적인 동시에 위험한 작업이다. 너무나 잘 알려져 일종의 장르 관습처럼 굳어져버린 이야기를 새삼 지금 끄집어내 비틀고 재구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스트레스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결국 팀 버튼의 <혹성탈출> 리메이크(2001)처럼 덩치만 크고 무기력한 영화가 탄생하기 마련이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가장 잘 알려진 원작 1편을 복기하는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조해낸다. 반토막이 난 자유의 여신상과 그 앞에서 울부짖고 있는 찰턴 헤스턴에 관한 잔상 없이도, 우리가 이 유서깊은 이야기의 최신작을 이토록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건 매우 즐겁고 유쾌한 일이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혹성탈출4-노예들의 반란>(1972)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수혈받았다. 원작 2편에서 테일러(찰턴 헤스턴)는 핵폭탄 스위치를 눌러 지긋지긋한 지구를 날려버린 바 있다. 3편은 지구가 폭파되기 직전 우주선을 타고 대피했던 코넬리우스-지라 부부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지구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다. 애초 이 커플을 환영했던 미국인들은 수천년 뒤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터미네이터>에서 터미네이터가 사라 코너를 뒤쫓듯 그들과 아기를 살해한다.

그러나 아기는 죽지 않았다. <혹성탈출4-노예들의 반란>은 비밀리에 동물원에 맡겨져 자라난 아들 ‘시저’의 이야기다. 근미래, 개와 고양이가 바이러스에 의해 몰살된 이후 인간들은 유인원을 훈련시켜 애완동물로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인원의 신세는 곧 노예로 전락하고, 시저는 이와 같은 동족의 비극을 참을 수 없다. 시저는 유인원들을 규합해 봉기하는 데 성공한다. 1편에서 유인원들이 신처럼 숭배하는 시조 ‘위대한 유인원’이 바로 시저다. 시저가 엄연히 미래 유인원 종족의 씨라는 점에서 시간여행의 패러독스가 발생한다. 이건 그냥 일종의 평행우주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하다. 5편에선 한발 더 나아가 지도자 시저가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시리즈 1, 2편의 비극을 비켜간다는 결말에 이른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인류가 멸망하는 계기는 원작의 핵전쟁이 아닌 바이러스다. 시저 또한 신약 개발 과정에서 실험체 침팬지의 지능이 높아지면서 탄생한다. 그러나 시저가 유인원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의 큰 줄기는 원작과 같다. 영화 속의 유인원보다 훨씬 더 제도화된 순환구조 안에서 착취당하고 있으면서도 태연하기 이를 데 없이 체제에 종사하는 데 만족하는 우리들을 떠올려보면 이 시리즈가 얼마나 잘 구축된 우화인지 실감할 수 있다. 하물며 유인원도 저 정도 스트레스에 ‘봉기’하는데. 원작과 리메이크 모두 입이 트인 유인원이 가장 먼저 뱉어낸 말은, 다름 아닌 ‘노’(No)였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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