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극장뎐
무진은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승옥의 글에서, 공지영의 문장 안에서, 그리고 영화 <도가니>의 컷 안에서 무진은 그리 멀지 않은 공간으로 우리 앞에 열린다.
안개에 덮인 외딴 곳 무진에서 사람들은 자기 죄가 쉽게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어둡고 침침한 곳이기 때문에 더 많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의 속내, 누군가의 정체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이 드러날 때, 우리는 화를 내거나 침묵한다. 물론 어느 쪽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땅의 어디든 존재하는 이 면피의 공간은 얕은 분노와 은밀한 침묵 안에서 그 세를 불려왔다. <도가니>의 텍스트를 앞에 두고 당신은 얼마든지 불편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규탄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당장의 분노가 아니다. 선동은 이 이야기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 영화는 공감에 관한 영화다.
영화 <도가니>는 공지영이 쓴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한 영화다. 공지영의 소설은 지방의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교장과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수년 간 추행하고 폭행했다. 공지영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벌어진 사실의 절반을 담고 있다.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다. 영화 <도가니>는 공지영이 말하는 실체를 다시 한 번 덜어내었다.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다. 영화 <도가니>는 영등위로부터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끔찍한가, 대신 우리가 보고 듣고 읽을 수 있는 ‘대체된’ 현실이 실제 벌어진 일의 절반의 절반 조차 담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에 슬퍼해야한다. 하물며 그렇게 축소된 현실이 스크린에 비춰지는 게 ‘너무 불편하다’며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불편하다, 는 말은 때로 이렇게 무책임하고 잔인하다. 이른바 사회통념이라는 것과 실체를 가진 현실 사이에는 얼마나 방만한 간극이 존재하는가. 그 간극 안에서 현실을 토로하는 비명은 얼마나 무력한가. 공지영의 취재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그 애들이 원래 문란했다”고 말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은 무진의 여자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리고 서울로 돌아간다. 공지영의 <도가니>에서 주인공은 아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가 버리고 시위 현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서유진을 외면한채 서울로 돌아간다.
영화 <도가니>의 강인호는 소설과 조금 다르다. 물론 여기서도 끝에는 서울의 일상을 살아가는 강인호를 비춘다. 그러나 영화의 강인호는 소설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사실 현실의 인간형에 가까운 것은 소설의 주인공일 것이다. 우리는 가장 외면하고 싶어하는 현실을 밟고 서서 그것이 나의 취향이나 정치적 강박에 위배되어 불편하다고 말하며, 편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들만을 노래하고 살아나간다. 어디선가 그런 나쁜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런 우리들에게 무진은 하루 빨리 벗어나서 잊어버리고 싶은 곳이다.
무진은 휴식을 핑계삼아 가끔 갈 수 있는 공간이다. 무진은 내가 나보다, 남보다 더 나아보이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실상 무진에 살고 있었다. 극 중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한 숨을 내쉰다. “세상에 옳고 그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옳은 것만 하고 살 수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러나 재판 과정을 지켜본 어머니는 달라져있다. 그는 아들에게 과자가 가득 든 먹봉지를 내밀며 겸연쩍은 몇마디를 뱉고 총총히 걸어나간다. “어째 어른들이 그랬다냐.” <도가니>는 당신에게 죄책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공감해 줄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각자의 무진에 살고 있다는 공감을, 여기 아픈 사람들이 있다는 공감을, 그것이 그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눈 앞에서 치워버리려 하지 말아달라는 공감 말이다. 이곳은 무진이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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