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은의 환등상자 <컨테이젼>
영화가 시작하자, 아직은 검은 화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마른기침 소리가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것 같다. 불길하다.
화면이 열리니, ‘D-2’라는 자막과 함께, 며칠 밤을 꼬박 새운 것처럼, 아니 피가 돌지 않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여인(귀네스 팰트로)이 바에 앉아 있다. 숏의 동선은 마치 꼭짓점을 잇듯, 여인의 손이 닿은 물건들을 빠르게 따라간다. 그가 입을 댄 컵, 먹던 땅콩 그릇, 그리고 계산을 위해 그의 손에서 점원의 손으로 넘어간 신용카드. 지금까지는 그 이동경로를 따라갈 수도, 되짚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잠깐. 그는 계속 기침을 하고, 숨을 쉬고 있다. 이 호흡의 경로는 대체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그는 지금 공항, 그러니까 폐쇄된 어딘가가 아니라 세계의 교차로에 있다. 영화의 무대는 이제 바이러스가 퍼져가듯 급박하게 홍콩, 도쿄, 시카고, 파리, 런던 등지로 뻗어간다. 그러니까 여기서 ‘바이러스가 퍼지듯’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은 제목 그대로 정체불명의 접촉성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다. 공항에서 기침을 하던 여인, 베스를 중심으로 바이러스는 그가 홍콩 출장길에서 스쳐갔던 이들에서부터, 이후 이들이 스쳐가는 또다른 사람들까지 무서운 속도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들은 도미노 블록 하나가 순식간에 전체를 쓰러뜨리듯, 치료를 시도할 겨를도 없이 바로 죽음의 연쇄 속에 놓인다.
귀네스 팰트로, 케이트 윈즐릿, 주드 로, 마리옹 코티야르, 맷 데이먼 등 할리우드의 쟁쟁한 스타 배우들이 한꺼번에 등장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이야기를 추동하는 주인공으로 보이지 않는다. <컨테이젼>의 강력한 주인공은 박쥐의 병균이 돼지로 옮겨진 결과라고 이후에 밝혀지는 신종 바이러스다. 소더버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사연에 정박할 여유를 부리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확장되는 경로와 속도 그대로를 숏의 배열에 반영하는 길을 택한다.
이 숏들 사이에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할 틈은 없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공포를 자아내는 방식은 등장인물 각각의 비극적 드라마를 보여줌으로써가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점차 바이러스로 번져가는 숏들을 보고 있다는 느낌, 이 이상한 영화적 체험을 우리에게 주는 데 있다. 영화는 바이러스에 의해 죽음을 맞는 자들 대신, 바이러스의 원인을 찾고, 신약을 연구하고, 사태에 대처하거나 사태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최소의 드라마를 주지만, 그 드라마가 바이러스의 파급력(곧 편집의 속도와 리듬)을 늦추거나 이기지 못하게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바이러스의 정체를 해부하는 속도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숏들이 구축되는 속도를 추월하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인가. 이 영리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내가 <눈먼 자들의 도시> 속 인물이라도 된 양, 진행되는 숏들에 눈이 감염된 것처럼 간질거려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눈을 씻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