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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도가니’가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

등록 2011-10-09 20:05

허지웅 영화평론가
허지웅 영화평론가
허지웅의 극장뎐
지난 지면에서 이미 <도가니>를 다루었다. <도가니>라는 텍스트는 선동이나 분노가 아닌 공감의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각자의 무진에 살고 있다는 공감, 여기 아픈 사람들이 있다는 공감, 옳은 일만 하고 살라는 게 아니라 그른 일을 세상의 필연적인 일부처럼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는 공감, 그리고 그것이 그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에서 치워버리려 하지 말아달라는 공감 말이다. 분노는 눈에 보이는 것을 당장 단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가 공개된 이후 세상의 반응은 꽤 소란스러웠다. 개봉 2주 만에 300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극장을 찾아 한마디를 보탰다. 이번에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른바 ‘사회현상’이 되면서 영화의 실제 소재가 된 6년 전의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잦아졌다. 당시 사건에 관련된 판사와 검사, 변호사, 경찰관의 목소리가 인터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전파되었다. 경찰은 전면 재수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광주시와 시교육청은 인화학교 법인허가 취소와 폐교를 추진하고 있다. 각 정당은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와 복지재단 규제 등의 내용을 담은 법을 만들겠다고 서둘러 발표했다. 가장 먼저 한나라당이 사회복지재단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나라당은 이를 ‘도가니 방지법’이라 부르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2007년 지금과 거의 같은 내용의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한나라당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사회복지법인대표이사협의회와 함께 공세를 펼쳐 결국 법 개정을 무산시켰다. ‘빨갱이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도가니 방지법’이 아니라 ‘사상 전향법’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자유주의 수호전사가 영화 한 편으로 복지 좌빨이 되는 마법의 속내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 소란 속에서 한줌의 진심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향후 억울한 일이 생기면 법원을 찾을 게 아니라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건가. 영화의 충격 효과로 당장 바뀔 수 있는 나라의 법체계란 얼마나 보잘것없고 애초 부패한 것인가. 이전까지 바로 그 부패한 체계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었는데도 이제 와서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의도된 말을 끊임없이 생산해가며 선동의 스펙터클 안에 몸을 숨기고 좀더 요란한 제스처로 분노하는 정치인과 보도매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바로 여기가 무진이라는 실감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근사한 것이다. 아주 가끔이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영화로부터 분노를 얻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의 규탄을 요구하고, 영화의 제목을 가져온 이름의 법을 만드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법 개정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되고 문제가 된 사학법인의 인가가 취소된다고 해서 <도가니>라는 영화가 묘사하는 부조리의 근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금의 분위기는 분노와 연민의 유행에 가깝다. 동등한 입장에서의 공감이 아닌 연민으로서의 유행은 앞으로 더 강력한 피해자를 예고할 뿐이다. 당장 우리는 장애인과, 약자와 어울려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더 나은 환경에 격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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