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리투의 신작 <비우티풀>
남다은의 환등상자 <비우티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전작 <바벨>은 표면적으로는 4개국(멕시코, 모로코, 미국, 일본)을 오가며, 그곳의 인물들을 엮어내는 영화다.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연적인 사건으로 연결고리를 찾지만, 영화는 그 우연이 국제정치 안에서 필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지극히 개인적 차원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에피소드들이 실은 전지구적 차원의 계급 문제, 인종 편견, 테러리즘의 맥락 등으로 얽혀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벨>은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영화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결코 평등할 수 없는 4개국 인물들의 삶의 조건을 ‘우연’이라는 매개를 통해 영화적으로 동일한 선상에서 나열한 뒤, 1세계와 3세계의 그 불평등함을 결국 개인의 운명처럼 다루고 마는 것. <바벨>의 지리적, 형식적, 이야기적 요란함이 그 공허한 끝에 이르러 미학적인 허세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냐리투의 신작 <비우티풀> 역시 <바벨>이 빠진 함정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은 영화처럼 보인다.
바르셀로나의 더럽고 후미진 뒷골목을 배회하는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인력 브로커로 근근이 살아간다. 심한 조울증에 걸린 아내와 헤어지고 홀로 남매를 키우는 이 남자는 짝퉁가방 공장을 운영하는 중국인과 그 가방을 파는 아프리카계 이주민들 사이에서 뇌물상납과 중개를 알선하는 일을 한다. 욱스발의 삶은 이주민들의 위태롭고 빈곤한 처지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그는 말기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한없이 보잘것없는 이 남자도 단 하나의 특별한 재능을 가졌으니, 그는 망자의 마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그 능력은 지하실에 갇힌 중국인 밀입국자들이 난로에 질식해서 죽음에 이른 후부터, 구원이 아닌 점점 더 큰 두려움으로 그를 옥죈다.
말하자면 <비우티풀>의 화두는 죽음이다. 아무런 제도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인종, 성, 계급의 주변부 인물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이사슬에 얽혀갈 때, 이들의 운명은 죽음 안에 놓일 수밖에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가 체제에 의한 밀입국자들의 부당한 죽음과 질병에 의한 욱스발 개인의 죽음을 어느새 동질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다.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죽음의 영적 기운에 대한 미학적인 매혹이 지극히 현실적인 조건 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시급함을 슬쩍 봉합해버린다.
악덕 브로커의 죽음을 숭고하게 그린 게 문제가 아니라, 영화가 죽음에 대한 자신의 관념적인 미혹을 위해 현실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죽음을 희생시켰다는 혐의가 문제다. 더럽고 고통스럽고 척박한 현실은 죽음의 고양을 위해 거기 있다는 생각을 거두기 어렵다. 그래서 이 가련한 사내의 개인적인 고통에 종종 마음이 흔들리기는 해도, 한 편의 영화로서 <비우티풀>에 깃든 간교함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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