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호평받은 새 영화들이 늦가을 줄줄이 관객들을 찾는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지난해 감독주간상을 받은 <네 번>(20일 개봉)과 올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트리 오브 라이프>(27일 개봉)는 삶과 생명에 대한 사색적인 성찰을 전한다. 이달 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청원>(다음달 3일 개봉)은 화려한 색채와 익숙한 음악으로 관객의 감각을 일깨운다.
이탈리아판 워낭소리 ‘네 번’
‘음메에~’ 염소 울음소리, ‘딸랑딸랑’ 종소리, ‘스르르르’ 바람에 부딪혀 몸을 떠는 잎사귀 소리. 영화 <네 번>엔 사람의 소리, ‘대사’만 없다. 천천히, 심심하게 흘러가는 영화다. 하지만 ‘언어의 홍수’에서 벗어나고픈 이들에겐, 삶과 죽음, 소생과 소멸의 순환을 조용히 음미하는 짧은 묵언수행 같은 영화가 될 것이다.
20일 개봉한 <네 번>은 이탈리아 서남부 칼라브리아의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교회 바닥에서 긁어모은 먼지를 약처럼 먹고 살던 늙은 목동이 죽은 직후. 아기염소가 태어난다. 들판에 나섰다가 길을 잃은 아기염소는 전나무 밑에서 위태롭게 깊은 잠에 빠져든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고, 동네 사람들은 아기염소가 잠들었던 곳에 있던 전나무를 베어 마을축제에 사용한다. 그 전나무는 불가마에서 숯이 되고, 숯은 늙은 목동이 살았던 마을의 집 곳곳으로 운반된다. 감독은 ‘목동-염소-전나무-숯’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통해 무언가의 ‘끝’이 어떤 것의 ‘시작’이 되는 자연의 순환을 응시한다. 국내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처럼, 그 동네 사람, 동물, 자연이 주인공이다. 이탈리아 출신 미켈란젤로 프람마르티노 감독이 5년여에 걸쳐 제작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네 개의 다른 캐릭터에 연속적으로 깃드는 영혼의 신비한 여행”이라고 설명했다.
황금종려상 ‘트리 오브 라이프’
<천국의 나날들>, <씬 레드 라인> 등을 만든 테런스 맬릭 감독이 영상으로 쓴 시다. 중년의 건축가 잭(숀 펜)이 부모님, 두 남동생과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전체적인 이야기는 단순하다.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버지(브래드 핏)가 때때로 드리우는 공포나, 그런 남편과 그에게 상처받는 아이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어머니(제시카 채스테인)의 불안함도 특별히 새로운 모습은 아니다. 한 줄로 요약되는 이야기와 목가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인간의 역사를 뛰어넘는,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시작에 대해 자유로운 상상을 펼친다.
영화 초반부에는 우주 대폭발에 이은 지구의 탄생부터 공룡이 살던 시대까지를 보여주는 15분짜리 영화 속 영화 ‘생명의 역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나올만한 이 영상은 주인공이자 해설자인 잭의 ‘작은’ 이야기가 우주의 거대한 순환과 동떨어진 게 아니란 걸 분명히 보여준다. 검은 바탕 가운데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형상도 영화 틈틈이 삽입돼 ‘태초’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심는다. 한편 영화에는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장면이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마천루가 빽빽이 들어선 도심의 하늘, 위로 향하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하늘을 반쯤 가린 나무숲, 웅장한 파이프오르간까지 카메라는 의식적으로 ‘저 위’를 끊임없이 비춘다. 여기에 ‘19살에 죽은 남동생’을 향한 어머니의 내레이션이 입혀져 영화의 따뜻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영화는 회상 속에서만 살아있는 사람들과, 빌딩 숲이 있던 자리를 언젠가 뛰어다녔을 공룡들처럼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존재했던 생명들을 소중히 기억하려 한다. 이 단순하고 거대한 영상시를 보고 분명 누군가는 지루해할 수 있지만, 또 누군가는 더없이 경이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인도 산자이 감독의 ‘청원’
무대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부와 명예를 쓸어 담았던 최고의 마술사 이튼(리틱 로샨)은 사고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전신마비 환자가 돼 버렸다. 결코 ‘원더풀’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휠체어를 탄 그는 시종 ‘왓 어 원더풀 월드’를 노래한다. 더구나 그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달라며 인도 법정에 안락사를 청원해 놓은 상태. 건장한 남성이 사고로 척추를 다쳐 불구가 된 설정이나, 그가 ‘스스로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 세상과 싸운다는 내용은 스페인 영화 <씨 인사이드>(2004)를 연상시키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사람을 공중에 띄우고 허공에서 촛불을 만들어내는 화려한 마술쇼와 검붉고 짙푸른 색채의 화면이 관객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왓 어 원더풀 월드’, ‘스마일’처럼 익숙한 팝송도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역설적으로 인생을 예찬한다. 2009년 국내에 개봉한 <블랙>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사랑받은 인도의 산자이 릴라 반살리 감독이 연출했다. <블랙>에서도 시각과 청각장애를 가진 소녀의 이야기를 다뤘던 그 자신 역시 “<청원>을 통해 ‘좋은 삶’, ‘더 나은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발리우드 스타 아이슈와리아 라이가 이튼을 12년 동안 간호하며 사랑하는 소피아 역으로 출연하는데, 그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영화 속에서 반짝인다. 한때 이튼이 마술을 펼치던 고급 레스토랑에 이튼과 함께 찾아간 소피아가 음악에 맞춰 갑자기 독특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박보미 송호진 기자 bomi@hani.co.kr
사진 영화사 진진,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초반부에는 우주 대폭발에 이은 지구의 탄생부터 공룡이 살던 시대까지를 보여주는 15분짜리 영화 속 영화 ‘생명의 역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나올만한 이 영상은 주인공이자 해설자인 잭의 ‘작은’ 이야기가 우주의 거대한 순환과 동떨어진 게 아니란 걸 분명히 보여준다. 검은 바탕 가운데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형상도 영화 틈틈이 삽입돼 ‘태초’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심는다. 한편 영화에는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장면이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마천루가 빽빽이 들어선 도심의 하늘, 위로 향하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하늘을 반쯤 가린 나무숲, 웅장한 파이프오르간까지 카메라는 의식적으로 ‘저 위’를 끊임없이 비춘다. 여기에 ‘19살에 죽은 남동생’을 향한 어머니의 내레이션이 입혀져 영화의 따뜻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영화는 회상 속에서만 살아있는 사람들과, 빌딩 숲이 있던 자리를 언젠가 뛰어다녔을 공룡들처럼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존재했던 생명들을 소중히 기억하려 한다. 이 단순하고 거대한 영상시를 보고 분명 누군가는 지루해할 수 있지만, 또 누군가는 더없이 경이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인도 산자이 감독의 ‘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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