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우티풀>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 <비우티풀>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에 관한 영화는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특히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종종 황폐하게 만든다. 아버지를 다루는 영화가 닿을만한 종착지에는 두어가지 적당한 사례가 있다. 이를테면 <피와 뼈>처럼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가부장의 짐승 같은 인생과 후회하지 않는 끝을 보여줄 수 있다. 혹은 <파리, 텍사스>처럼 있는 힘껏 참회하고 노력하며 끝내 모든 걸 책임지고 떠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하는 <비우티풀>의 아버지는 그 가운데 어느 한 점에 위치해있다. 흡사 <추격자>의 주인공처럼 사회 안전망 경계 사이에 기생하면서 약자를 착취하고 동시에 보호하는, 자기모순으로 가득찬 <비우티풀>의 주인공은 영화적이라기에는 굉장히 다층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스크린 속의 소위 ‘대체된’ 아버지로서 관객과 화해하거나 단절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 감독은 148분의 상영시간 내내 이 복잡한 성격의 아버지를 연민으로 가능한 힘껏 감싸안으려 한다. 그러나 그 여정의 끝이 결핍된 실패인지 완결인지에 대해서는 감독 자신조차 단정짓고 싶지 않은 눈치다.
주인공 욱스발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빈민촌에서 불법 이민자 노동력을 유통하는 중간 브로커다. 또한 죽은 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민자들을 착취해서 이윤을 얻어낸다. 동시에 법이 지켜주지 않는 이민자들을 대신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은 욱스발은 암 진단을 받고 남은 시간이 3개월 정도라는 말을 듣는다. 욱스발은 새삼 자식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는 사건들을 통과하며 괴로워한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그간 이냐리투의 영화 속에서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되어 왔다. <아모레스 페로스>에는 과거 가족을 버린 뒤 혁명에 투신했다가 지금은 쓸쓸히 늙어가고 있는 한 남자가 딸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21그램>에는 폭력적인 가부장으로서의 행동과 더 나은 아비가 되고 싶은 열망이 혼재된 남자(베네치오 델 토로)가 구원을 찾아 가족을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풍경이 나온다. <비우티풀>은 이 소재를 전면에 끄집어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아버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냐리투 스스로 아버지에게 바친다고 설명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늙은 떡갈나무, 나의 아버지에게 바친다. 그 분은 그 이유를 잘 알고 계신다.”
죽음을 맞닥뜨린 남자가 남은 시간 동안 무언가 남기고 싶어 노력한다는 대목에서 <이키루>의 다른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는 <비우티풀>은, 그러나 유한한 시간을 단지 허무하게 응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키루>와 또 다르게 갈라져 나간다. 인간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적막함과 죽음 자체에 저항하는 분주함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욱스발의 처연한 발버둥은 전자에 속한다. <비우티풀>에서 욱스발의 노력은 (최소한 영화적으로는) 미완의 상태로 방치된다. 욱스발의 삶은 막연한 화해와 눈물로 마무리되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이냐리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적 고백을 하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극 중 시종일관 거울에 비친 사물과 실체가 어긋나 흘러가는 것처럼, 현실과 현실의 투사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과 균열이 존재한다. 그 틈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아비가 되기란 얼마나 고된 것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허지웅 영화평론가
영화 <비우티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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