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극장뎐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의외의 작품이다. 그동안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지형도 위에서 볼 때 <돼지의 왕>은 일종의 기형적인 사건에 가깝다. 장르물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더 도드라지는 특징은 제작 과정에서 발견된다. 이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정확한 기획에 잘 짜인 운영만 동반되면, 스태프들에게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후반 작업 비용을 포함해 6, 7억원 선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다는 요지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당장 한번에 일본의 <아키라>(80억원), <공각기동대>(75억원) 같은 대작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잘 만든 ‘이야기’로서의 저예산 애니메이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기존에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지금은 교수를 하고 있는 어느 감독이 이의를 제기해왔다. 그런 제작비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며 당신은 현실을 모른다고 했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하면 사람들은 일단 수십억 이상 제작비가 들어가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장르라고 미리 확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까지 늘 그랬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제작 비용은 팔할이 인건비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제작비는 수직상승할 수밖에 없다.(사실 그래서 인력 착취가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원더풀 데이즈>는 126억원의 제작비가 들었다. 만드는 데 7년이 걸렸다. <돼지의 왕>의 제작비는 1억2천만원이다. 이야기 착안은 노무현 정권 시절에 했지만 정작 투자를 받은 뒤 순 제작 과정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억2천만원으로 만들어지는 장편 애니메이션은 다신 없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 됐든 <돼지의 왕>은 저예산으로 장편 애니메이션 기획을 운용할 수 있다는 극단적 사례로서 의미를 갖는다. 여전히 나는 서로 착취하거나 핑계 없이 결과물에 전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건전한 제작비로 6, 7억원 선을 주장하고 있다.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돼지의 왕>의 작화에는 솔직히 미흡한 면이 있다. 연상호의 전작인 단편 <사랑은 단백질>은 장편 <돼지의 왕>보다 조금 더 많은 제작비로 만들어졌는데, 그에 비하면 확실히 기술 면에서 물리적인 공백이 드러난다. 그러나 반응을 보면 일반 관객은 <돼지의 왕>의 그림체나 움직임에 상당히 호의적이다. 기술적 미흡함이나 비대중적인 작화를 지적하는 일부 전문 커뮤니티들의 비판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인데, 이 부분은 제작자나 관련 종사자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중요한 건 기술적 완성도나 상품화 가능한 귀여운 캐릭터가 아니다.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돼지의 왕>은 명백한 우화다. 어떤 이들은 <말죽거리 잔혹사>, 또 어떤 이들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층위에서 이 작품을 지켜볼 것이다. 공부도 싸움도 잘하는 ‘귀족’과, 나머지 ‘돼지’들로 채워진 그 학교, 그 교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돼지들의 ‘왕’. 그러나 <돼지의 왕>은 사실 프랭크 밀러 버전의 <배트맨> 텍스트에 더 근접한 이야기다. <돼지의 왕>은 영웅 담론을 정면으로 해부하고 나선다. 사람들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영웅을 만들어내고 추앙한다. 혹은 영웅이 되고 싶은 누군가가 나서서 사람들의 취향에 부응하며 선두에 선다.
그러나 영웅에 환호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영웅의 실체 사이 괴리를 참을 수 없게 된다면? 그 헛된 영웅의 실체를 우상으로라도 남기지 않을 수 없는 처연함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그때는 우리들의 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돼지의 왕>은 ‘영웅’을 소비하는 소위 ‘민중’의 저열함에 대한 세련된 텍스트이자, 한국의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에 명확한 대안과 희망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사례로 오래도록 회자되고 기억될 것에 틀림없다. 내게 있어 <돼지의 왕>은 올해 최고의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사설] 노동자 안전 뒷전 중대재해법 후퇴가 민생 대책인가 [사설] 노동자 안전 뒷전 중대재해법 후퇴가 민생 대책인가](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300/180/imgdb/child/2024/0116/53_17053980971276_20240116503438.jpg)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①국내서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①국내서](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320/imgdb/original/2023/1228/20231228503768.jpg)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②번역서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②번역서](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3/1228/2023122850380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