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극장뎐
소위 20대 문제라는 화두가 대충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로 귀결되며 흐릿해지는 양상인데, 이 문제에 대해 떠올릴 때마다 답답해진다. 세대 담론이 애초 당연히 이행되어야 마땅했을 계급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기는커녕, 기성세대들에 의해 ‘청춘’을 둘러싼 감상적 소회로 귀결되고 그 안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애틋하고 축축한 말은 ‘외부 환경에 의해 강요된 아픈 시기를 어떻게 견뎌내야 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이고 딱딱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이 겸연쩍게 만들어버린다.
자, 여기 이제 막 20대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여전히 그 관성 위에서 절룩거리고 있는 한 남자를 보자. 그의 이름은 로키 발보아다. 통장에 잔고라고는 고작 106달러뿐이었던 30살의 가난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3일 만에 써내려간 <록키>의 주인공. 스탤론 자신과 똑같은 나이와 상황에 처한 남자다. 스탤론이 로키 발보아이고 로키 발보아가 스탤론이었다. 배우 오디션에 찾아갔다가 여지없이 탈락하고 힘없이 발길을 돌리던 찰나, 스탤론은 희대의 제작자 어윈 윙클러와 로버트 차토프를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저, 제가 시나리오를 좀 쓰는데 요즘 복싱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써둔 게 있거든요. 한번 봐주시겠어요?” 그리고 스탤론의 인생은 영영 바뀌었다.
이 영화 속 두개의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평소 로키를 ‘건달’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체육관장 미키가, 챔피언 아폴로와의 결전을 앞둔 로키에게 매니저가 되어주겠다며 찾아온다. 그러면서 자신이 젊었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고 얼마나 훌륭한 복서가 되었는지 주구장창 늘어놓는다. 로키는 폭발한다. “엄청 오래 걸렸군요. 내 집까지 오는 데 무려 10년이나 걸렸어요. 10년. 왜요, 내 집이 싫어서요? 좁아서요? 냄새가 나요? 그렇죠, 냄새가 나죠! 당신은 전성기를 얘기하는데, 그럼 내 전성기는 어디 있어요? 당신은 그거라도 있지, 난 아무것도 없어! 난 벌써 서른살이야! 경기를 해봤자 엄청나게 얻어맞겠지, 다리도 팔도 이젠 전처럼 말을 안 들어! 이제 와서 날 도와주겠다고? 여기 들어오고 싶어요? 그럼 들어와요! 냄새가 지독해! 젠장 온 집안이 냄새투성이야! 날 도와줘 보라고요!” 그 좁고 더러운 방은 스탤론이 시나리오를 썼던, 실제 자기 단칸방이었다(제작비가 모자랐다. 영화 내내 로키가 입고 다니는 옷이나 모자도 스탤론이 평소 쓰던 것들이다). 그는 20대 내내 단 한번도 찾아와주지 않았던 그 ‘기회’라는 것에 대해, 로키의 입을 빌려 분노하고 있다.
다음 장면. 챔피언 아폴로와의 시합 전날 밤이다. 로키는 벌벌 떨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보다 못한 그의 연인 에이드리언이 시합을 만류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로키가 말한다. “시합에서 져도,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아무도 거기까지 가본 적이 없거든.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 거야.” 다음날. 15라운드 마지막 종이 울렸을 때 로키 발보아는 두 발로 서 있었다. 시합 결과는 그의 판정패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로키는 끝없이 흐느꼈고, 관중은 승자가 아닌 패자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로키의 마지막 대사가 흘러나온다. “에이드리언, 내가 해냈어.”
<록키>는 지난 세월을 꼰대들과 불화하며 답답하게 보낸 서른살의 한 남자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온전하게 증명해내는 이야기다. 그의 해답은 이기든 지든 끝까지 자기 힘으로 버티어내는 데 있었다. 지난 2년6개월 동안 이 칼럼을 쓰면서 언제나 로키 발보아 이야기로 끝을 맺고 싶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모두들, 부디 끝까지 버티어내시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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