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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이상하게도 ‘노동하는 여인의 노래’가…

등록 2011-11-27 20:15

남다은의 환등상자 <방랑기>
여기 한 소녀가 있다.

봇짐을 지고 행상을 하던 가난한 부모를 따라 그녀는 도시를 떠돌았다. 그렇게 여인이 되었다. 이제 늙은 부모는 그녀의 짐이 되었고, 그녀는 더욱 가난해졌다. 하루를 벌고 하루를 살았다. 공장을 다니고 점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이렇게 읊조렸다. “국수 한 그릇이라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다면.”

처진 눈썹과 반달눈을 가진 이 고운 여인은 언제나 담담하게 허기짐을 말했다. 이제 그녀는 술집 여급이 되었다. 그리고 구석진 바와 허름한 여관에서 시를 썼다. 하이네와 휘트먼과 푸시킨을 좋아하는 그녀가 쓴 시의 제목은 ‘노동하는 여인의 노래’다. 명석하고 아름답고 대범한 이 여인을 남자 문인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가난한 시인의 낭만으로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남자들은 매번 그녀를 배신했다. 그녀가 벌어온 돈을 쓰며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를 질투했다.

그녀는 그래도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팔고, 그리고 밤이면 글을 썼다. 그녀는 시를 사랑했지만 그건 꿈이 아니라, 가난을 버티고 사랑을 견디는 노동이었다. 비겁한 남자들은 떠났고, 떠났다가도 더 초췌해진 몰골로 돌아왔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작은 초를 켜두고 다른 일꾼들이 자는 방 한 켠, 작은 책상 앞에 앉아 그녀는 쓰고 또 썼다. 그리고 마침내 ‘방랑기’라는 제목의 소설로 그녀는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결국 자신의 가난을 이야기로 팔아서 세상의 환대를 받은 거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더 단단해진 표정으로 그녀는 다짐했다. “계속 쓸 거야. ‘방랑기’는 내 전부가 아니야.”

이제 그녀도 주름진 노인이 되었다. 그녀는 더이상 가난하지 않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러 찾아온다. “바보 같으니라고. 가난한 자들은 스스로 일을 해야만 해.”

그녀는 자신에게 오랜 시간 구애했으나 정작 사랑하지 못했던 남자에게 지친 얼굴로 묻는다. “내가 너무 냉정한가요?”

그녀에게 평생 선량했던 남자는 답한다. “세상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 거지요.”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는 여인은 여전히 그녀 앞에 놓인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잠이 든 것 같은데, 그녀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우물처럼 패어 있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녀는 부모와 떠돌던 소녀 시절로 돌아가, 넓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하야시 후미코(1903~1951)의 자전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나루세 미키오의 후기작, <방랑기>(1962년)의 내용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그녀의 소설 여러 편을 영화로 만들었다. 지난여름, 유달리 습하고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이 영화를 보고 어딘가에 이렇게 적었다. “가난과 싸우며 가난 안에서 가난을 딛고 가난을 이용하며 가난을 품은 글을 썼으나 끝내 가난을 이기지 못한 고단하고 용감한 여인. 시를 쓰는 여인.” 이제 겨울이다. 따져보니 벌써 1년8개월이 흘렀다. 환등상자를 닫는 마지막 글을 쓰려는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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