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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엔딩 크레디트’ 좀 조용히 보게 해주오

등록 2012-02-12 21:01

민용근의 디렉터스 컷

어느 멀티플렉스 상영관. 영화가 서서히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영화는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고, 관객 모두 그 마지막 숨에 주목하고 있다. 그때, 상영관 뒤쪽에서 누군가 걸어 내려온다. 발소리에 힐끗 돌아보느라 난 잠시 영화를 놓친다. 내 옆을 지나간 정체불명의 사람은 스크린 바로 앞쪽까지 걸어간다. 난 그를 쳐다보다, 또 잠시 영화를 놓친다. 그사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검은 화면 위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순간, 그 정체불명의 사람이 행동을 개시한다. 그가 출입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입고 있던 극장 유니폼이 드러난다. 출구 밖 환한 빛이 상영관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기다렸다는 듯 상영관 불이 켜진다. 관객들은 일어나 우르르 나가고, 출구는 잠시 정체 현상을 빚는다. 어느새 유니폼 입은 직원들이 투입되어 바쁘게 쓰레기를 주우러 돌아다닌다. 아직 엔딩 크레디트는 올라가고 있고, 대미를 장식하는 영화음악은 애절하게 흘러나오는 중이다. 영화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부여잡고 싶은데, 둘러보면 상영관의 관객은 나밖에 없고, 쓰레기 줍는 직원들이 은근히 눈치를 주는 순간! 불현듯 내 머릿속엔 개그콘서트 황현희씨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정말이지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해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왜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엔딩 크레디트가 시작되자마자 급하게 불을 켜고, 급하게 관객들을 내보내려는 걸까요?”

극장의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많은 관객들도 엔딩 크레디트가 시작되면 일찌감치 자리를 뜨는 것을 당연시 한다. 단 1~2분의 어둠도 허락되지 않는 그 상황이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누군가에게 엔딩 크레디트는 의미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별한 관심이 없는 이들에겐 누가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모든 관객들에게 엔딩 크레디트의 마지막까지 앉아 있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엔딩 크레디트를 볼 수 있는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엔딩 크레디트는 그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의 이름이 담긴 소중한 장면이자, 영화를 되돌아보고 그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이기도 하다. 감정적 여파가 큰 작품일수록 엔딩 크레디트의 어둠 속 시간들은 그 영화만큼이나 중요한 순간일 수 있다.

상영 시작 시간에 10분간의 광고는 틀면서,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디트를 볼 수 있는 짧은 시간은 왜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물론 극장 쪽에선, 일찍 나가려는 관객의 안전 문제 때문에 미리 불을 켜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영화 상영관을 비롯한 일부 극장에서는 엔딩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극장의 불을 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런 문화를 만들어온 덕에, 그 극장에 오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엔딩 크레디트가 다 끝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자연스레 여긴다. 일찍 자리를 떠야 하는 관객들도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인다.

영화를 보는 문화는 관객의 몫도 있지만, 극장이 먼저 조성해줘야 하는 부분도 엄연히 존재한다. 멀티플렉스는 우리나라 극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만큼 영화 관람 문화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는 이야기다. 관객에게 앞자리를 발로 차지 말라는 극장예절을 설교하기에 앞서, 영화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보장해야 하는 극장 자신의 에티켓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한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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