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문화관
[민용근의 디렉터스 컷]
아담한 방과 단정한 책상. 문을 열면 하얗게 웃고 있는 목련과 재잘대는 작은 새들. 맑은 공기와 정성으로 지어진 밥. 자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선, 일상의 잡념들을 내려놓고 오로지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다. 아마도 지금은 내가 영화를 시작한 이래 누리는, 가장 과분하고 호사로운 시간일 것이다.
지난 3월부터 강원도 원주시 매지리에 있는 ‘토지문화관’(사진)에서 지내고 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고 박경리 선생님이 만드신 이곳에서는 2001년부터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을 운영하고 있다. 소설, 시, 동화, 평론, 미술, 연극,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국내외 예술인들이 이곳에 머물며 창작활동을 할 수 있으며, 입주 작가로 선정된 예술인들은 한 달에서 3개월까지 창작 공간과 식사, 편의시설 등을 무료로 제공받는다. 지금도 이곳엔 문인과 화가, 극작가, 영화감독 등 총 15명의 예술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매우 단순하다. 하루 중 대부분은 각자의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식사 시간이 되면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 그 후엔 함께 산책을 하거나 탁구를 친다. 물론 가끔의 술자리도 빼놓을 수 없다. 입주 작가들의 연령대도 다양해서 아버지, 어머니, 삼촌, 이모, 형, 동생들이 함께 사는 대식구가 연상된다. 부모님 세대의 작가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고민과의 접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다른 분야의 예술가와 실질적인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행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의례적인 교류가 아닌, 함께하는 일상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서로간의 교류는 좀더 깊이 있고 진실되다. 단순한 창작 공간에서 벗어나, 각계각층의 예술인들과 함께 ‘생활’하도록 한 이곳의 배려이자 숨은 뜻이리라.
이렇게 두 달 가까이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이 있다. 바로 박경리 선생님이다. 비록 살아계실 적에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그분이 남기신 세심한 배려와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농토와 자연이 어우러진 곳에 마련된 터, 작업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의 풍경, 이 땅에서 태어난 농작물로 만들어지는 매끼의 음식들. 당신이 평생 동안 추구하셨던 ‘생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공간과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스스로 작가이셨기에 작가들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고, 이를 토지문화관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셨다. 작가가 산책을 하는 것도 창작의 연장이니 꼭 필요한 용건 이외에는 함부로 말을 걸지 않도록 직원들에게 교육시키셨고, 식사 때는 직접 만드신 반찬을 내오기도 하셨다.
지금도 선생님의 따님이신 김영주 관장이 어머니가 하셨던 역할을 이어 하고 계신 모습을 보며, 이곳이 물질이 아닌 마음으로 지어진 공간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지난 4월20일은 박경리 선생님의 4주기가 되는 날(음력 기준)이었다. 유족뿐 아니라, 현재 창작실의 입주 작가들, 지난 10여년간 이곳을 거쳐 갔던 예술인들이 함께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제사 다음날이면, 토지문화관을 거쳐 갔던 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매년 한 그루씩의 나무를 심는다. 그렇게 지난 몇 년간 심어진 작은 나무들이 토지문화관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 어린나무들을 보면 이런 장면들이 떠오른다. 어느 한 예술가의 노력과 의지에서 비롯된 작은 씨앗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가는 풍경. ‘토지문화관’이란 이름처럼, 이곳은 수많은 예술인들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 ‘토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문화적 토지가 좀더 넓게 확산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민용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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