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
[토요판] [TV +] 김성윤의 덕후감
최근 신촌 대학생 살인 사건을 보면서 이른바 사령 카페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사령이 존재한다고 믿는 10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생각보다 굳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령 관념을 위시로 한 오컬트 문화가 사실은 ‘세카이계’(セカイ系·유약한 주인공이 파멸된 세계에 맞서는 스토리라인)의 일본 서브컬처(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라이트노벨 등)와 강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에 있다. 오컬트란 기존의 과학으론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초자연적인 현상, 혹은 그에 대한 신비주의적 추종 현상을 뜻한다.
가령 세카이계 서브컬처의 원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원시 종교적 상상력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제목의 ‘신세기’라는 말도 그렇고, 원시 기독교의 ‘사해문서’에 근거하여 인류 보완 계획을 가동하는 것도 그렇다. 판타지가 텍스트로 현실화되기 위해선 완결적인 구성이 필요한데,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존의 역사적 종교와 신화가 동원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최근의 오컬트 문화가 과거의 분신사바 놀이나 정령문화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카이계 서브컬처가 오컬트 문화에 질서화된 언어와 내러티브를 공급해줌으로써 이를 종교적 단계(믿음, 교리, 의례, 지도자, 징벌, 계파)로까지 이행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령의 존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판타지물에 나오는 어휘들(소환, 헬게이트, 몹 등등)을 사용하곤 한다. 온·오프라인에서 사용하는 말투 역시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자의식-현실-판타지의 3자적 연결고리에서 현실이라는 중간항을 소거한다는 점에 있다. 자의식과 판타지가 직접 연결되어 있는 2자적 구도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인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의 사회적 상징질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세카이계의 묵시록적 세계관은 대략 이렇다. ‘상처투성이인 나(님)는 아무도 모르는 세계에 눈을 뜬다. 이것 자체가 선택받은 능력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조력자들과 함께 이미 파멸되어 있는 세상을 구원 내지 재편할 소명이 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러티브 구조는 현실의 그들을 인식하고 동시에 고양할 만한 동기로 작동한다. 그들은 세카이계의 세계관을 차용 혹은 변용한다. ‘소외 상태에 있는 현실의 10대들이 아무도 모르는 오컬트의 세계를 접한다. 이것 자체가 선택받은 능력이다. 따라서 그들은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소셜네트워킹을 하고 파멸로 나아가는 지금의 세상에 맞선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정신적으로 견디는 방식이기도 하다.’
혹자는 세카이계 서브컬처에 열광하거나 오컬트 문화에 심취한 10대들을 보고 ‘중2병’ 운운하며 조소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10대들이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고 비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미디어 탓이라고 몰아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소위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과 거울상을 이룬다는 점이 신기할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실감각 있(다고 상상되)는 우리들은 자의식-현실-판타지의 3자적 연결고리에서 판타지라는 궁극의 항을 소거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실재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실제로 현대인들은 단지 자의식-현실의 2자적 구도로 세상을 살아가곤 한다.
그런 점에서 오컬트 문화는 우리와 같은 몸통을 가진 또다른 얼굴인 셈이다. 오컬트 문화는 자기중심적 현실주의에 매몰된 현대문화를 희롱하는 건 아닐까. 현실(reality)이란 어차피 실재(the Real)의 표현형에 불과하지 않은가, 라고.
문화사회연구소연구원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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