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의 시네마즉설
<이지훈 평론가 유고집>
영화평론가 이지훈의 유고집 두 권이 세상에 나왔다. 그가 마흔두살의 나이에 저세상으로 간 지 1년 만이다. 그는 2011년 6월30일 뇌종양 투병 끝에 육신을 놓았다. 생전의 그는 글도 잘 썼지만 인품도 좋아서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이번에 나온 유고집도 후배들이 십시일반으로 시간과 열정과 돈을 들여 만들어낸 작품이다. 영화 월간 <스크린>에서 기자로 경력을 시작한 이지훈은 <네가>라는 영화잡지의 편집장을 거쳐 <필름 2.0>의 취재팀장과 편집장으로 일했고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썼다. 그가 쓴 초창기 글들 가운데 유실된 것은 후배들이 직접 손으로 타이핑해 이번 유고집에 실었다.
지난 6월29일 홍대 근처의 한 카페에서 그의 가족과 지인들 100여명이 모여 섭섭하지 않게 치른 유고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나는 묘한 상념에 빠졌다. 주변 사람들이 계속 술을 권했으나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줄기차게 비가 내리던 심야의 2차 술자리에서도 마냥 내 심정은 그랬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고 자꾸 감상적이 되는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필름 2.0>에서 오랫동안 그와 함께 일했던 나는 영화잡지 저널리즘의 한 시대가 그의 죽음으로 종언을 고하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지금은 잡지나 신문에 실린 영화 글보다는 네이버 영화 평점이 더 주목을 끄는 시대이다. 아마 이런 얘기를 생전의 이지훈과 나눴더라면 “그게 뭐 어때서요? 각자 할 일이나 잘하면 되죠”라는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유고집 <내가 쓴 것>과 <해피-엔드>에 실린 이지훈의 대다수 글들은 우수하다. 이지훈은 누구와도 닮지 않은 글을 쓰려 했다. 그걸 본인은 ‘창조적 오독’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정성일 등 기성 평단의 큰 존재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은 정식으로 학교에서 비평이론을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성과 통찰로 사력을 다해 영화를 다르게 읽어내려 했다. 어깨에 너무 힘을 주고 쓴 본격 비평문은 재미가 덜하지만 경쾌하게 적은 배우론이나 에세이, 인터뷰는 훌륭하다. 그가 잡지와 방송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썼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그런 과중한 노동의 산물로 나온 글들이 그렇게 고른 수준을 유지했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놀랍다.
이는 이지훈 개인의 삶의 흔적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우리 시대의 영화 저널리즘의 흔적이기도 하다. 한때 영화 주간지가 3개씩이나 공존했던 시절의 이면에는 과중한 노동과 그에 따른 피로를 견디면서도 어떻게든 수준을 지키려는 각자의 열정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그때 그 시절 영화 저널리즘 종사자들의 삶에 대해 자화자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저열한 노동조건을 견디며 고군분투했던 그가 남들보다 일찍 세상을 뜬 것이, 후배들에게도 생전 화를 내지 않았던 고인의 인품 탓에 제 속에서 번식한 숱한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을까 속이 쓰린 것이다. 그런 한편 영화 글쟁이로서의 자기 존재 증명에 절실하게 매달린 한 젊은 글쟁이의 자존심이 상기되어 에너지를 얻는다. 2000년대 한국영화계의 거품 섞인 활황에는 저널리즘 종사자들의 이런 열정이 뒤를 받쳤다.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곁에서 필사적으로 중언부언하지 않기 위해 애썼던 어떤 삶의 흔적을 이지훈이 남긴 글들에서 새삼 느낀다. 그러니 그를 기억해주시고 그의 유고집도 좀 사주시라.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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