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마음 움직이는 건 기교 아닌 ‘진심’

등록 2012-08-26 19:24

영화 감독 민용근
영화 감독 민용근
민용근의 디렉터스컷
가출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에서 주관하는 1박2일 캠프에 다녀왔다.

‘자기 표현을 위한 스토리텔링’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종의 강사 역할이었다. 쉼터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10명의 청소년이 그 대상이었는데, 모두 자신만의 사연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프로그램 주제를 받고 나서 어떻게 진행해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이곳 소장님이 말씀하길 언젠가 아이들이 직접 사용자 제작 콘텐츠(UCC) 동영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고 이런 과정들을 통해 그런 바람을 이루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프로그램의 절반은 다양한 사람들이 만든 단편영화들을 보면서 개개인의 작은 경험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의 영화로 완성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머지 후반부 2시간은 각자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어느 순간에 대해 글을 쓰고 한 사람씩 발표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 객관화된 이야기로 완성되는 과정을 체험해 보는 시간이었는데, 할 이야기가 없다며 발을 빼던 친구들도 자신의 차례가 되자 각자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잊지 못할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 가출했을 때 ‘날밤 깠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도 있었고, 아이스 녹차라떼를 처음 먹었을 때의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도 있었고,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고 있는 지금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중 한 여학생이 이야기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부모님이 안 계셨던 그 친구는 보육원에서 지내며 그곳 원장 수녀님을 부모님처럼 여기며 자라왔다고 했다. 그곳에 사는 동안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중 어느 할머니 집을 방문해 현관문을 열었던 그 짧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도 열악해 보이던 집 안과 그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 친구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 같다. 힘들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문득 만난 적도 없는 자신의 부모님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 할머니가 부모님같이 느껴졌고, 그 순간적인 기시감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아마 쉼터에서 같이 지내오던 친구들에게도 처음 꺼내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울음을 참고 눈물을 닦느라 몇 번이나 이야기가 중단됐다.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 그만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할까 했지만, 애써 울음을 누르며 꿋꿋하게 한마디씩 이어나가는 모습에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달변이 아니었다. 오히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말도 느리고 어눌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이야기하는 모습 속엔 그 누구의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사실 ‘스토리텔링’이라는 주제로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아이들에게 어떤 기교와 방법을 알려줄까에 대해서만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물론 방법도 중요했겠지만, 그 친구의 ‘스토리텔링’을 들으며 새삼 깨달았던 건 태도의 중요성이었다. 울음을 참는 동안 흐르던 침묵의 시간들과 힘겹게 한 단어씩 뱉어내는 순간마다 느껴지던 용기 있는 진심들. 힘든 이야기를 힘들게 이겨내며 이야기하는 것.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쓰고, 혹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진심으로 가기 위해 빠르고 쉬운 지름길만 찾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너무 쉽게 말해지는 진심만큼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영화감독

<한겨레 인기기사>

“안철수 길가는 여자 쳐다봐” ‘나쁜남자 놀이’ 인기
‘도둑들’ 뺨치는 신한은행 복마전 시나리오
정비공장서 발견된 주검…‘사고 땐 살아있었다’
손학규·김두관 이어 정세균도 ‘울산경선 불참’
“감독에게 차라리 날 포기하고 버리라고 했죠”
피겨퀸 김연아, 5년만에 ‘록산느의 탱고’ 완벽 재현
[화보] 돌아온 ‘탱고 여신’ 김연아, 명품 연기 그대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