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업사이드 다운>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초속 11.2㎞. 지구 중력을 벗어나려면 최소한 초속 11.2㎞의 속도를 필요로 한다. 우주선이 지구 궤도를 벗어날 수 있는 최저 속도. 두 발로 뛰어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속도. 그래서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중력을 거역하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패할 걸 뻔히 알면서도 껑충, 기어이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땅으로 잡아끄는 악착같은 힘에 저항하며 한 뼘이라도 더 지구에서 멀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아주 잠깐, 아주 조금, 땅에서 멀어지고 하늘에 가까워지는 자들의 어떤 숭고한 아름다움을 나는 사랑한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첫 장면. 침대 위로 솟구치는 빌리가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빌리는 무대 위 공중으로 높이 뛰어오른다. 중력을 뿌리치고 잠시 허공에 머무는 그 짧은 순간을 영화는 정지 화면으로 만들어준다. 빌리가 사랑한 찰나의 희열을 영원한 자유로 바꾸어 선물해준 감독의 마음 씀씀이가 나는 참 고마웠다.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에서도 눈물나게 아름다운 순간을 보았다. 1974년 8월7일 아침. 지금은 무너지고 없는 뉴욕 쌍둥이빌딩 두 꼭짓점을 연결한 줄 위의 곡예사 필리프 프티. 지상 411.5m, 110층 건물 꼭대기에서 그는 세찬 바람에 휘청이며 45분을 버텼다. 굵기 2㎝에 불과한 가느다란 밧줄 위를 안전장치 하나 없이 걸어다녔다. 그러곤 웃었다.
오래된 흑백 기록사진 속 그의 희미한 미소는 일본 영화 <중력피에로>의 대사가 사실이란 걸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 영화에서 공중그네 타는 피에로를 보며 주인공의 아버지가 말했지.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지구의 중력에서 자유로운 법”이라고. 그래서 까마득히 높은 허공을 걷는 그 아찔하고 위태로운 순간에도 곡예사는 기쁘게 웃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발가락으로 몸을 지탱하며 수직으로 점프해서 가능한 한 오래 공중에 머무는’ 발레의 모든 동작은 단 1초만이라도 지구의 중력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고안되었다. 가능한 한 높이 솟구쳐올라 가장 경이로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장대높이뛰기 선수도 발레리나와 같은 꿈을 꾸며 달려간다. 왕의 남자들이 보여준 마지막 공중부양도, 국가대표들의 스키점프도, 킹콩을 들어버린 역도 역시, 김연아의 트리플러츠와 더 높은 곳을 향한 고 박영석 대장의 우직한 행군도 물론. 감히 이 세상의 중력과 싸워서 얻은 값진 승리의 순간들이다. 잠깐 땅에서 멀어지고 또 잠깐 하늘에 가까워지지만, 결국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어쩌면 이 우주가 허락한 가장 아름다운 패배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새 영화 <업사이드 다운>(사진)이 곧 개봉한다.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마주 보고 공존하는 두 개의 행성. 위 행성에 사는 여자와 아래 행성에 사는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각자 자기 행성의 중력에 순응해야 하는 규칙을 깨고 남자는 위로, 여자는 아래로, 상대의 행성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이야기. 나는 이 영화의 몇몇 장면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기 몫의 중력을 거역하려는 안간힘. 필사적으로 내 세계에서 멀어지고 사력을 다해 그(녀)의 세계에 가까워지려는 몸부림. 그 안간힘과 몸부림의
공중부양이 역시나 기특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맹목적이고 필사적으로 무엇을 갈망해본 것이 언제였던가? 나는 무엇으로부터 그토록 맹렬히 벗어나려 애쓴 적이 있던가? 나를 잡아끄는 모든 힘에 순응하느라 아주 그냥 납~작해진 내 인생을 성난 얼굴로 돌아보며 혼자 괜히 또 시무룩해지고야 말았다.
경제학자 폴라니가 말했다(고 들었다). “진정한 진리는 만유인력 법칙이 아니다. 중력을 뿌리치고 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지금, 중력을 뿌리치고 날아오르는 모든 이들에게 경례! 미안하지만 뉴턴 아저씨는 조용히 찌그러져 사과나 깎아 잡숫는 걸로….
김세윤 방송작가
<한겨레 인기기사>
■ 들어야 한다, 안타쳐도 박수를 치지 말라
■ [나·들] 피범벅 환자 옆엔 탈진한 연예인…
■ 말하는 코끼리 ‘코식이’, 외로워서 한국말 배웠다
■ 주말부부 3년째, 남편집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 거대석상, 뒤뚱걸음으로 옮겼나 눕혀 옮겼나
■ 캐릭터가 들어오자 연기력이 사라졌다
■ [화보] 내곡동 진실 밝혀질까?
김세윤 방송작가
<한겨레 인기기사>
■ 들어야 한다, 안타쳐도 박수를 치지 말라
■ [나·들] 피범벅 환자 옆엔 탈진한 연예인…
■ 말하는 코끼리 ‘코식이’, 외로워서 한국말 배웠다
■ 주말부부 3년째, 남편집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 거대석상, 뒤뚱걸음으로 옮겼나 눕혀 옮겼나
■ 캐릭터가 들어오자 연기력이 사라졌다
■ [화보] 내곡동 진실 밝혀질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