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2005)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그는, 말하자면 궤도를 이탈한 별이었다. 남자아이는 총싸움, 여자아이는 인형놀이의 궤도를 따라 돌아야 하는데, 그는 남자이면서 이상하게 인형놀이에 더 관심이 많았다. 체육 수업 대신 가사 수업을 듣고, 바지보다 치마를 더 입고 싶어 하는 남자. 그는, 아니 그녀는, 온 동네 사람이 성당에 다니는 1970년대 아일랜드 시골 마을에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별이었다.
그날 밤도 여느 때처럼 예쁘게 차려입고 밤거리를 배회하던 주인공 패트릭(킬리언 머피). 모터사이클을 타고 정처없이 떠도는 폭주족 무리와 마주친다. 그들의 리더가 잔뜩 폼잡고 허세를 부린다. “난 단순히 길 위를 달리는 게 아니야. 현자를 뒤에 태우고 미래로 여행하는 중이지. 내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알아? 난 수많은 별을 유람하고 화성을 방문한 후 플루토에서 아침을 먹을 거야.”
플루토(Pluto). 명왕성. 그곳이 어디인지, 그곳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정말 그곳에 갈 수는 있는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그냥 플루토…. 그 막연한 어감이 좋았다. 어차피 지구라는 별에서 ‘여자로 살고 싶은 남자’가 행복하게 머물 곳은 없으므로. 자신은 이미 세상이 정한 궤도를 이탈해버린 별이므로. 생각만 해도 근사한 그곳 플루토에서 아침을 먹는 상상으로 이 시시한 땅 지구별의 고난을 이겨내기로 마음먹는다. 시대를 횡단하고 운명을 종단하는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한다.
닐 조던 감독의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2005)에서 명왕성은 아웃사이더의 이상향으로 언급된다. 결국 지구를 벗어나진 못할 테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플루토!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행성을 가슴에 품고 가장 자유로운 지구인으로 살다 가겠다는 다짐. 가고 싶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어떤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명왕성은 플라톤의 ‘아틀란티스’이자 제임스 힐턴의 ‘샹그릴라’이며, 이루고 싶지만 아마 끝내 이루지는 못할 어떤 꿈이라는 점에서 민주당의 ‘정국 주도권’이자 내 뱃가죽의 ‘식스팩’ 같은 것이기도 하다.
2006년, 국제천문연맹은 아웃사이더의 별 명왕성을 실제로 아웃시켜 버렸다. 태양계 9번째 행성의 지위를 박탈한 것이다. 7월11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 <명왕성>(2013)은 전교 1등 유진(성준)의 입을 빌려 명왕성이 퇴출된 이유를 가르쳐준다.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고, 궤도는 불안정합니다. 다른 행성처럼 둥글지도 않고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갖기에는 질량도 너무 작아요.” 유진의 말이 끝나자 전교 2등 한명호(김권)가 말한다. “완전 루저네.”
1970년대 아일랜드 청년이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그 별은 2013년 한국 청소년이 절대 닮고 싶지 않은 별이 되어 있다. 이유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부와 권력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고, 부모님의 벌이는 불안정합니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둥글둥글 약게 닳아빠지지도 않았고 상위 1%의 지위를 넘보기에는 욕망의 질량이 너무 작아요.”
그래서 착하지만 가난했고 꿈은 있지만 ‘빽’이 없는 고등학생 주인공 김준(이다윗)은 처음부터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끼리 똘똘 뭉쳐 나머지 행성들을 밀쳐내려 안간힘 쓰는 경쟁의 악다구니. 1%의 우주에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이 스스로 빛을 잃고 소멸해가는 블랙홀 같은 교실. 교사 출신 감독 눈에 비친 지금 이곳,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한 장면. 특별한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해 용의자가 되어 돌아온 이종석에게 이보영이 묻는다. 내가 뭔지 아느냐고. “국선 전담 변호사 아닙니까? 잘 모르겠지만 느낌은 알겠어요.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때,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아닙니까?”
그 말에 새삼 자신의 역할을 깨치는 국선 변호사 이보영의 극중 이름이 공교롭게도 ‘혜성’이다. 세상 모든 명왕성들이 지금 혜성을 기다린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때,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단지 모양이나 질량, 거리만 가지고 별의 지위를 판단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항변하는 친구를 어둠 속에 혼자 남겨두지 않을 사람. 외로운 행성 앞에 정말 혜성같이 나타나는, 넌 태양계에서 밀려난 게 아니라 태양계에서 탈출한 것이라며 내 어깨를 토닥여줄, 그런 사람을 말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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