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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일대종사] 검무의 예술가들

등록 2013-09-02 17:01수정 2013-09-02 17:06

영화 리뷰
<일대종사>의 주요 공간 중 하나인 금루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곳이었다. 중국 광둥 지방 최초의 승강기가 설치되고, 아름다운 기생들이 모이고, 온갖 화려한 소품들로 장식된 화려한 요정이기 때문은 아니다. 강호의 영웅들이 드나들며 서로의 내공을 확인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대종사>가 금루라면 이는 <2046>(2004) 이후 거의 10년 만에 한자리에서 만난 왕가위 감독, 양조위, 장쯔이 세 고수 덕분일 것이다. 영화에서 장쯔이는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궁이 역을 맡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쳐내고, 양조위는 묵묵히 무예의 길을 지키는 엽문을 연기해 서사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는다. 6월15일 왕가위 감독과 함께 내한한 양조위, 장쯔이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라”는 극중 궁 대인의 대사처럼 <일대종사>를 되돌아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음 장부터 펼쳐진다.


[양조위] 보이지 않는 적과의 사투

인터뷰룸에 들어선 양조위는 한숨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침부터 분단위로 배정된 인터뷰 루트에서 이제야 좀 벗어난다는 안도감으로 읽혔다. 한국에서 가지는 마지막 인터뷰, 그의 밝은 미소는 ‘이제 좀 편히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무언의 동의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구석자리를 골라 앉은 그는 바짝 의자를 당겨 기자와의 거리를 좁히는데, 양조위의 눈빛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다. 몇 차례 양조위와 가진 인터뷰에서 절절히 깨달은 것 하나. 그는 눈빛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엽문을 말하기 전에, 그는 <비정성시><화양연화> <무간도>에서 보았던 깊은 슬픔이 모두 뒤엉켜 있는 눈빛을 내놓는다. 배우의 정수를 훔쳐보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이다.

<일대종사>에서 양조위는 영춘권을 전파한 실력자이자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1893∼1972)을 연기한다. 엽문은 1930년 일제침략기 혼란스러운 정국, 남방무술의 새로운 실력자로 급부상한다. 당시 전국 무술계를 통합한 궁가의 궁 대인은 자신의 후계자로 제자 마삼(장첸)이 아닌 엽문이 적임이라 생각한다. 날카로운 칼을 품은, 공격적인 기질의 마삼과 다르게 엽문은 “쿵후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수직과 수평의 만남”일 뿐 실력의 우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인물이다. 왕가위 감독은 “내가 파악한 엽문은 전형적인 무술인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무술에 능하지 못한 배우 양조위에게 엽문을 굳이 맡긴 이유를 설명한다. “감정을 잘 조절하고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 실제 양조위의 면모는 엽문과 무척 닮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일대종사>에서 그는 영웅으로 소비된 기존 엽문에 대한 이미지가 무색하게, 관조자 같은 모습을 선보인다. 혼란한 정세를 타개하려는 적극적인 행위 대신, 그 시련의 중심에 서서 어떤 풍파도 다 맞고 있는 모양새다. 시대의 아픔을 그러안은 존재, 양조위 특유의 애잔함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양조위
양조위

양조위가 왕가위의 ‘엽문’을 아무런 부담없이 떠안은 건 아니다. “엽위신 감독의 <엽문> 시리즈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견자단은 홍콩을 대표하는 최고의 액션 배우 아닌가.” 왕가위 감독의 제안이 가장 의외였던 건 양조위 자신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왕가위 감독이 이 작품을 선택하는 데 많은 고민이 있었겠다 싶더라. 워낙 싸우는 장면이 많으니 얼마나 힘들지 예상이 됐지만,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촬영 전부터 오랫동안 양조위는 영춘권을 배우며 엽문의 무술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엽문의 아들을 직접 만나 인물에 대해서 탐구해 나갔다. 엽문의 체형을 닮고자 했고, 걸음걸이와 자태까지 모두 습득했다. 무술인이지만 학자적인 면모를 갖춘 문인의 모습에 가까웠던 엽문. 양조위는 첫 장면부터 관객을 사로잡는다. 아마도 <일대종사>의 많은 결투 신 중 최고로 기억될 오프닝 신. 잿빛 화면 속 양조위는 절제된 움직임으로 우중결투를 펼친다. 상대를 제압하는 움직임이지만, 상대가 아무도 없는 듯한 움직임. 미세한 파동까지 잡아내는 왕가위의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는 빗속의 춤사위에서 양조위의 ‘엽문’ 은 광채를 발산한다. “말도 말아라. 그 장면 촬영하는 데 50일이 걸렸다. 연일 날씨도 추웠는데, 비 때문에 온몸이 젖은 상태에서 액션을 하다 보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이 영화가 엽문의 액션보다는 다른 지점에 주목했다고 하지만, 난 액션의 강도가 높다고 평가하고 싶다. (웃음)”

<중경삼림>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등을 통해 왕가위와 꾸준히 작업해왔으니 둘의 인연도 꽤 깊다. 촬영에만 꼬박 3년을 매달려야 하는 지난한 시간, <일대종사>는 그 신뢰가 바탕이 된 협업이었다. “20년 동안 왕가위 감독을 알고 지냈는데 그는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미리 나온 시나리오가 없었는데, 그 스타일에 난 이제 완전히 적응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엔 엽문이라는 인물이 있어서 참고할 거라도 있었고, 상황이 좋았던 편이다.” 양조위가 습득한 엽문. 그걸 털어내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는 “올해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내게 영화는 인연이다. 좋은 인연을 만나야 좋은 작품도 나온다. 적어도 당분간은 좀 쉬고 싶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웃음)”

글 : 이화정 | 사진 : 손홍주


[장쯔이] 완벽하고 강한 구(球)

<일대종사>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 시내의 한 호텔 복도 앞에 모인 수많은 매체 기자들은 고수와의 대련을 앞둔 도전자처럼 보였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대한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손에 들린 질문지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다. 문이 30분마다 열리는 까닭에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만 들릴 뿐 복도는 날카로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소가 복도로 바뀌었다”는 스탭의 안내를 받고 복도 한쪽 모퉁이에 자리한 소파에 이르자 장쯔이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흐트러짐 없는 자세, 고집이 느껴지는 무표정 등 그의 태도에선 30분마다 상대를 바꿔가며 대련한 데서 오는 피곤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위엄 가득한 ‘궁이’처럼.

전국 무술계를 제패한 ‘궁(宮)가’의 유일한 혈육. 인생의 봄에서 겨울로 훌쩍 뛰어넘는 시기의 엽문(양조위)과 무술로 교감한 여자. 아버지인 궁 대인(왕경상)이 자신의 후계자였던 제자 마삼(장첸)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복수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행복해지기 위해 결단을 도모하는 여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건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1930년대 중국 여성들과 달리 궁이는 그야말로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장쯔이와 인터뷰하기 전 잠깐 만난 왕가위 감독은 궁이를 “단순히 여성이라기보다 아름다움의 최상위에 있는 존재”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무술세계에 여성은 없었어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였던 시대니깐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진취적으로 뚫고 나가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에요”라고 궁이가 가상의 인물임을 설명했다. 장쯔이 역시 감독의 말에 동의하며 자신의 인상을 보탰다.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고요? 하하. 맞아요. 한마디로 구(球) 같은 사람. 어느 방향으로 봐도 일관되고 완벽해요.”

명쾌한 정리와 달리 장쯔이는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도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궁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몰랐다고 한다. “그의 인생을 완전하게 본 건 영화를 완성한 뒤 극장에서 상영할 때였어요. 어쨌거나 여배우로서 무협영화나 쿵후영화에서 이같은 진취적인 여성을 맡을 기회가 쉽게 있을까요? 전 없다고 봐요. 굳이 끌어들이자면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에서 제가 연기한 ‘용’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강호의 삶을 동경하며, 정략결혼에 희생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을 끊임없이 내보였던 그 뜨거운 용 말이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려면 멈추지 말라”는 궁 대인의 가르침대로 장쯔이는 궁리에 들어가 ‘잎사귀 아래 숨겨진 꽃’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흩날리기도 하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여인의 가장 차가운 모습을 서늘하게 내보이기도 한다. “무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천지를 보는 것이며, 마지막 단계는 중생을 보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달리 궁이는 “천지를 본 단계까지 이르는 데 그쳤”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것은 행동에 옮겼다. “궁이는 자신의 선택에 행복했을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장쯔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굉장히 행복했을 것 같아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으니깐요. 제가 궁이라면 그같은 선택을 했겠냐고요? 전 궁이가 아니에요. 그런 선택을 할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궁이가 존경받을 만한 거예요.”

장쯔이가 왕가위 감독과 함께 작업한 건 <2046>(2004) 이후 거의 10년 만이다. 그에게 왕가위라는 이름 석자는 “인생의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란다. “장이모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1999)은 배우로서 제 이름을 세상에 알려준 작품이고, <와호장룡>은 중국 밖에 있는 관객에게 제 이름을 알려준 작품이며, <2046>은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케 한 작품이에요. 그런 점에서 왕가위 감독님이 함께하자고 하면 바로 출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라며 왕가위 감독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냈다. 그의 다음 선택은 또 다른 거장, 오우삼의 신작 <태평륜>이다.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금융가에서 태어난 한 여자의 인생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일대종사>의 궁이가 그랬듯이 이번에도 장쯔이는 시대와 만만치 않은 싸움을 벌여야 한다.

글 : 김성훈 | 사진 : 손홍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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