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포스터 디자인계의 간판으로 꼽히는 배광호 그림커뮤니케이션 실장은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부터 최근 개봉한 영화 <스파이>까지 영화 200여 편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그는 영화 포스터 디자인이란 관객을 유혹하는 ‘낚시’의 기술이자 새로운 창작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문화‘랑’] 나도 문화인
<17> 영화포스터 제작자 배광호씨
<17> 영화포스터 제작자 배광호씨
포스터는 관객 끄는 ‘낚시’
디자인보다 이야기 먼저 보여야
작품 해석부터 제작까지 자체 완료
“또 하나의 창작물 제작 보람” 1998년 겨울,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시한부 인생의 사진관집 아들 정원(한석규)과 맑은 영혼을 가진 다림(심은하)의 아픈 사랑 이야기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대사를 던지며 영화 팬들을 참 많이도 울렸다. 15년이 흐른 지금, 영화를 쉽게 기억 속에서 되살리는 것은 주인공들이 윗옷 하나를 뒤집어쓰고 비를 피하던 포스터 한장이다. 이 포스터를 만든 포스터 디자이너 배광호 그림커뮤니케이션 실장은 “단 한 장면으로 영화를 기억하게 만드는 게 포스터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배 실장은 <8월의…>(사진)를 첫 작품으로 지금까지 국내 개봉 영화 200여편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뒤 디자인 회사를 다니다가 “포스터를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지인의 우연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계기였다. 핫팬츠 차림의 세 여성이 나란히 누운 채 다리를 들어올린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과외선생’ 김하늘이 ‘닭대가리 학생’ 권상우를 때려잡을 듯 방망이를 치켜든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거대한 스키점프대를 배경으로 하정우가 검은 고글을 썼던 <국가대표>(2009) 등의 포스터가 모두 그가 만든 것들이다. 올해는 <7번방의 선물>, <몽타주>, <아이언맨3>, <숨바꼭질> 등의 포스터를 제작했는데, 이 네 편의 관객만 계산해도 어림잡아 3000만명 넘는 사람들이 그의 포스터를 본 셈이다.
지난주 서울 한남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8월의…> 이전까지만 해도 포스터 디자인사들은 영화 제작사가 촬영해준 사진들에 추가 작업을 해주는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영화부터 디자인사들은 영화 제작사의 의뢰를 받아 시나리오를 직접 해석한 뒤, 포스터에 관한 기획부터 촬영·제작까지 자체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포스터가 ‘단순 그래픽 작업’이 아닌 영화 제작의 한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디자인 회사가 포스터의 해석부터 촬영까지 맡는 방식이 처음 도입됐을 때는 이런 개념 자체가 없어서 아주 어려웠어요. 하다못해 의상을 따로 준비해 주는 사람도 없어서 <8월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옷도 촬영 도중에 제 옷을 벗어서 찍은 거였죠.”
배 실장은 포스터의 역할이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낚시’라는 데 주저 없이 동의했다. “그게 포스터가 갖고 있는 본질이에요. 디자인이라는 점을 놓쳐선 안 되지만 영화 포스터는 순수 미술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디자인이 먼저 보이는 걸 지양하죠. 이미지든 카피 한줄이든 포스터에서 영화 속 이야기가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는 또 포스터 작업이 ‘디자인 예술’이 아닌 영화의 흥행을 위한 마케팅의 영역에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요즘은 포스터 제작사가 시나리오를 읽고 나름의 해석을 해요. 그게 영화 흥행에 또다른 요소로 작용한다고 본 거죠. 그래서 포스터 콘셉트 설정과 촬영장 세트, 사진 찍을 때 배우의 감정선 하나하나까지 포스터 제작사가 도맡고 있어요. 필요하다면 영화의 큰 방향과 다른 콘셉트가 담긴 포스터를 만들기도 하죠.” 포스터에 필요한 홍보 문구를 직접 쓰기도 한다. 지난해 450만 관객을 동원한 <연가시> 포스터에서 “2012년 5월13일 한강에 시체가 떠올랐다”는 문구가 그런 경우다.
배우들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이른바 ‘뽀샵’(컴퓨터를 통한 이미지 보정)은 기본적인 작업. 다리 길이를 늘리거나 허리 길이를 줄이는 것은 흔한 일이고 살을 깎거나 모공을 지우기도 한다. 지난 5일 개봉한 <스파이> 포스터처럼, 키 차이가 심한 다니엘 헤니(188㎝), 설경구(178㎝), 문소리(164㎝)가 비슷한 키처럼 보이도록 손질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포스터 작업에서도 한국 영화만의 매력이 특별하다고 했다. 외화는 직배사가 공급한 사진을 손볼 때 엄격한 제약을 가한다고 한다.
“큰 외화는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그림을 내놔야 하는 만큼 규격화돼서 정해진 것들이 많아요. 반면 한국 영화는 시나리오만 받아들고 우리 자체적인 콘셉트로 포스터를 만들 수 있잖아요. 완전한 하나의 창작물을 만들 수 있으니, 더 힘든 작업이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어요.”
주로 로맨틱 코미디나 휴먼 드라마를 해오던 그한테 지난해부터는 <연가시>나 <숨바꼭질> 같은 색다른 장르 영화들의 의뢰가 자주 들어온다. 그가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은 ‘팜파탈’ 같은 여성이 메인이 되는 영화나 ‘제대로 된 신파’ 같은 것들. 또 고전적인 의미에서 ‘포스터’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바람도 나타냈다.
“전자책처럼 넘길 수 있거나 이미지를 놓고 관객들과 소통 가능한 ‘인터랙티브’한 포스터 같은 것도 상상해보고 있어요. 알아서 소리를 내거나 사람들한테 반응하는 포스터가 있다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전혀 다른 반응을 기대해 볼 수 있겠죠?”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디자인보다 이야기 먼저 보여야
작품 해석부터 제작까지 자체 완료
“또 하나의 창작물 제작 보람” 1998년 겨울,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시한부 인생의 사진관집 아들 정원(한석규)과 맑은 영혼을 가진 다림(심은하)의 아픈 사랑 이야기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대사를 던지며 영화 팬들을 참 많이도 울렸다. 15년이 흐른 지금, 영화를 쉽게 기억 속에서 되살리는 것은 주인공들이 윗옷 하나를 뒤집어쓰고 비를 피하던 포스터 한장이다. 이 포스터를 만든 포스터 디자이너 배광호 그림커뮤니케이션 실장은 “단 한 장면으로 영화를 기억하게 만드는 게 포스터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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