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의 영화 불평
서울시민인권헌장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련의 소동은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감수성이 (심지어 그들이 진보를 자처한다고 하더라도)위험할 정도로 빈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슬픈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되어 온갖 이야기들이 다 돌았는데, 그 중 내가 가장 잊을 수 없었던 건 “우리 엄마도 동성애자를 싫어하는데, 그럼 우리 엄마도 일베란 말이냐!”라는 처절한 절규였다. 자기 엄마를 인질로 끌고 오는데 어떻게 논쟁이 진행되겠는가.
윤제균의 <국제시장>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자꾸 그 절규가 생각났다. 윤제규가 그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부모를 인질로 잡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반대이다. 그가 주인공들에게 자기 부모 이름을 붙여주고 부모 세대에 대한 러브레터와 같은 영화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운 순간부터 그 캐릭터들은 그 계획의 인질이 되어버렸다. 어렸을 때 가정폭력을 겪은 희생자가 아니라면 부모의 이름을 단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는 수에는 한계가 있다. 이 캐릭터로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
<국제시장>에서 윤제균은 캐릭터를 제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가 모델로 삼았던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과는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 덕수에게는 스스로의 개성이 없다. 흥남철수, 부산 피난 시절, 서독 광부 파견, 베트남기술자 파견, 이산가족찾기 같은 사건들을 잇는 도구일 뿐이다. 물론 그는 발전도, 성장도 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 생각도 없다. 그가 말려든 각각의 사건에 대해 어떤 의견도 갖지 않는 것은 윤제균의 프로젝트에서 중요했다. 주인공이 생각이란 걸 하는 순간 ‘우리를 위해 개고생을 한 부모 세대에 대한 러브레터’라는 계획 자체가 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윤제균은 이 탈색 과정을 통해 영화에서 정치를 제거했다고 믿는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순진할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현대사를 다룬 어떤 영화도 정치를 제거한 채 존재할 수 없다. <국제시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정치의 일부이거나 정치의 결과물이다. 서독 광부 파견까지는 어떻게든 자기를 속일 수 있겠지만 베트남전까지 은근슬쩍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가 베트남전에 대해 비정치적이 되려고 하는 순간부터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는 강한 정치성을 부여받는다. 그가 추구하던 ‘비정치적인 보편성’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가 예찬하려는 부모 세대부터가 비정치적인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
말은 저렇게 했지만 심지어 윤제균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영화에 군데군데 알리바이를 숨겨놓는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나이 든 덕수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에게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부산 학생들에게 덤벼드는 장면이다. 심지어 베트남전 에피소드에 남진을 등장시킨 것도 알리바이가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젊은 시절에 서독 파견노동자로 일하며 인종차별을 겪은 부산 노인이 자기 나라의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 노인이 그런 행동을 하려면 그 전에 그가 최소한의 자기 생각과 의지가 있는 인물임을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윤제균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되는 이슈가 있으면 도망가고 모르는 척 하느라 정작 주인공에게 그 간단한 행동에 필요한 그 어떤 생각도, 의지도 주지 않는다. 모든 게 변명 같고 알리바이 같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듀나 칼럼니스트
듀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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