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손님>의 떠돌이 악사 ‘우룡’(류승룡 분)
“나는 피리부는 사나이. 걱정 하나 없는 떠돌이. 은빛 피리 하나 갖고 다닌다.”(송창식 작사·작곡, 1974)
영화 <손님>(각본·감독 김광태)에서 떠돌이 악사 ‘우룡’(류승룡)은 송창식의 노래처럼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전쟁 통에 아내를 잃고 어린 아들이 결핵을 앓아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피리 부는 재주가 뛰어나, 귀가 달린 짐승들은 모두 그의 피리 소리에 움직인다. 이들 부자는 우연히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한 산골마을에 들어선다.
이 마을 사람들은 ‘촌장’(이성민)의 강력한 지도 아래 평화롭고 풍족하게 살고 있다. 다만,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지나칠 정도다. 더구나 마을은 난폭한 쥐떼들이 큰 골칫거리다. 고양이를 공격하고, 사람한테도 덤벼든다. 쥐떼를 쫓을 수 있다는 우룡의 말에, 촌장은 아들 병을 고칠 수 있는 큰돈을 준다고 약속한다. 우룡은 약장수한테 배운 지식과 자신의 피리 소리로 쥐떼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촌장은 약속한 돈을 주지 않으려 한다.
영화는 독일 전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기둥 줄거리를 따왔다. 쥐떼를 몰아내면 큰돈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얘기다. 영화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의 한 산골마을을 무대로 삼고 우리네 ‘손’의 전설을 덧입혀 외국 동화를 스크린에 옮겨왔다. ‘손’은 날짜에 따라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으로, 외부에서 찾아온 낯선 이라는 뜻의 ‘손님’의 어원이 됐다. 손님은 마마와 같은 돌림병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판타지 호러’ 장르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후반부에 관객의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배우 류승룡과 이성민의 연기가 돋보이고, 천우희도 제 역할을 다했다. <웰컴 투 동막골>(2005)의 강원도 산골마을 무대에서 <극락도 살인사건>(2007)과 같은 호러가 펼쳐진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영화 <이끼>(2010)를 떠올리는 관객도 많으리라. 무엇보다 영화는 결국 난폭한 쥐떼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폭력성이 더 무서운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자신의 첫 장편을 연출한 김광태 감독은 지난 2일 시사회 뒤 기자간담회에서 “약속에 대한 영화다. 요즘 약속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는 전반부에 평화로운 산골마을의 풍경을 그리려 했기 때문인지 다소 느슨하다. 감독은 “관객들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게 행간을 많이 띄웠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갖게 된 죄의식은 무엇에서 비롯됐는지 설명이 불친절하다. 무엇보다 약속의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약점이다. 우리는 대통령의 공약 파기를 비롯해 수많은 약속 파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영화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 교과서 속의 ‘공자 말씀’에 멈춘 것 같다. 촌장이 우룡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대목도 이물감이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 공동의 죄의식과 이들의 비겁함과 관련해선 <혈의 누>(2005)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든다. 9일 개봉. 15살 이상 관람.
안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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