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전’(典)자는 중국 고대 갑골문에서 기원한다. 마지막 두 획은 책을 떠받드는 두 손을 묘사했다. 이런 고전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두 편이 나란히 관객을 찾는다.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해 냈는지, 해석이 길을 잃지 않았는지, 여기가 승부처다.
3일 개봉한 <맥베스>(감독 저스틴 커젤)의 원작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년)의 4대 비극 가운데 하나다. “장차 왕이 되실 분”이라는 세 마녀의 예언으로 시작해, 맥베스가 왕을 살해하면서 결국 파멸하는 이야기다. 손을 물들인 피를 씻지 못하고 외려 바다를 붉게 물들일 것이라는 명대사도 등장한다. 400년 넘도록 빛이 바래지 않는 이런 대사들로 영화는 성찬을 벌인다.
100쪽 분량인 원작의 빈틈을, 감독은 조심스레 자신의 해석으로 채웠다. 첫 장면은 맥베스 부부가 죽은 어린 자식을 땅에 묻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원작이 세 마녀의 등장으로 시작하는 것에 견줘, 부부의 심리 묘사에 비중을 둔 셈이다. 맥베스가 스코틀랜드의 왕을 구하는 전투 장면은 잔혹한 전쟁의 참상을 스펙터클하게 담았다. 맥베스 부인의 비중도 원작보다 커졌는데, 무리로 느껴지지 않는다. 맥베스 부부로 분한 마이클 패스벤더와 마리옹 코티야르의 뛰어난 연기는 푯값을 한다.
악인이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갉아먹고 허물어지는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인간 양심의 고귀함을 확인할 수도 있다. 뒤집어, 인간이 스스로 감당도 못할 권력을 추구할 때 얼마나 측은해지는지 확인할 수도 있다. 작금의 정치 현실을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해석, 그래서 우리를 비추는 거울, 고전이 거듭 읽히는 이유겠다. 15살 관람가.
영화 <마담 보바리>. 사진 ㈜영화사 진진 제공
문학사적 위치가 크게 다르지만, <마담 보바리>(감독 소피 바르트)도 나름의 성취를 이뤘다. 무엇보다 500쪽 넘는 분량의 원작을 그다지 훼손하지 않았다. 소설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남편 보바리가 영화에선 빠졌다는 게 아쉽지만 감내할 만하다.
수입사에선 로맨스 장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그쪽과는 거리가 멀다. 운명적 사랑을 꿈꾸던 한 여인이 삶의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달콤한 사랑의 일탈을 꿈꾸면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려간다. 그 결과는 <맥베스>만큼 웅장하진 많지만, 충분히 비극적이다.
원작은 1857년 발표되면서 프랑스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고,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풍기문란 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시인 보들레르와 함께 100년 이상 이어진 모더니즘 사조의 첫머리에 우뚝 선 작품이다. 한 여인의 욕망 속에 투영된 부르주아 계급의 허영과 위태로움을 빼어나게 묘사했다. ‘가정의 틀을 벗어나려는 사치스러운 여성’은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잡았고, 그 뒤 반복 재생산됐다. 작품에 동시대성이 느껴지는 이유다.
프랑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여성 감독의 섬세한 연출, 화려한 드레스를 번갈아 입고 나오는 보바리 부인 역의 미아 바시코프스카의 출중한 연기는 관객을 플로베르의 세계로 인도한다. 다만, 영화는 원작처럼 프랑스 배경임에도 영국식 영어를 쓴다. 10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끝나면 바로 서점을 찾는 것은 어떨까. 두 작품의 원작 모두 1만원 남짓 한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장을 넘기노라면, 익히 알던 이야기의 ‘원석’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겠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