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 놈 : 인류의 시작>은 백승기 감독이 C급 영화를 표방하며, 1천만원으로 만든 영화다. 엣나인필름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인간의 탄생과 삶의 질문들을 극도로 단순한 양식 속에 그려낸 작품이다. 백승기 감독은 인터뷰에서 “살면서 느낀 의문점들을 SF영화의 양식 아래 풀고 싶었다”고 말했다. 제작비가 1천만 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영화의 외양을 짐작하도록 만든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근래 개봉한 영화 가운데 제일 가난한 영화이며, 일주일 남짓한 개봉 기간 동안 모은 관객의 수도 9백여 명에 그쳤다. 그런데 해맑은 얼굴의 감독은 그런 스코어쯤엔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더 신기한 건 매체마다 무명의 감독과 영화를 앞다투어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백승기는 흥미로운 인터뷰 상대다. 듣기 좋은 입담으로 영화의 홍보에 나선 그는 자기 영화의 정체를 C급영화로 규정한다. B급영화도 낯선 판에 C급영화라니? 그의 소개를 따르면 “C급영화란 캠코더로 찍어 컴퓨터로 편집해 사이버 상으로 개봉하는 코믹하며 크리에이티브한 시네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의 변화를 겪었으나 ‘누구나 자본에 구애받지 않고 상상력을 구현해낼 수 있는 영화’라는 성격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문제는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없고 감독 인터뷰와 홍보 이벤트 기사만 넘쳐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느새 백승기가 해프닝의 연출자처럼 보인다고 말한다면 과언일까.
영화의 악동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괴상한 만듦새로 주목받는 건 옛날 이야기다. 미적 차원에서 백승기의 영화에 접근하는 게 우선인데, 현재 상황으로 판단컨대 그와 그의 영화는 지면을 채울 소비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백승기는 “C급영화라고 해서 일부러 못 만든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라고 항변한다. 그의 진심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나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숫호구>와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을 보면서 미적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의도한 장면은 물론 무의식중에 연출된 장면 어디에서도 웃음거리 이상의 미덕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웃음의 차원을 보더라도, 백승기가 존경하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맛보았던 숭고한 경험과 비교해 간격이 너무 컸다.
남은 건 창작자로서 백승기의 태도다. 함께 개봉 중인 <플로렌스>에는 카네기홀에 선 음치 여성이 나온다. 얼핏 부르주아 여성의 치기처럼 보이지만, 플로렌스는 돈만 밝히는 남성들 앞에서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용기 있는 여성의 당당함을 보여준다. 백승기의 영화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은 어지간한 독립영화도 시스템 안에서 생존하는 때다. 시스템 바깥에서 출현한 그는 시스템을 공격할 때 제일 멋지다. 두 번째 작품을 만들면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은 그는 이제 생존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전문 스태프들에게 제작비를 지급하려면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그게 싫다면 스스로 제작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인터뷰 말미에서 “꾸준한 감독이 되겠다”고 밝힌 그의 미래는 이 숙제의 해결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용철/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