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영화제작전원사 제공
감희(김민희)는 결혼 이후 5년 동안 단 하루도 남편과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붙어 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뜻대로 살았다. 그런 감희에게 잠깐의 자유가 주어진다. 남편이 출장 간 사이, 감희는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오는 17일 개봉하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 <도망친 여자>는 감희의 만남을 따라가는 영화다.
감희는 먼저 영순(서영화)의 집에 간다. “긴 머리가 답답해서 잘랐다”며 짧은 머리로 나타난 감희에게 영순은 “정신 나간 고등학생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건넨다. 감희와 영순은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얼마 전 이혼하고 마음 맞는 룸메이트와 지내고 있는 영순은 훨씬 더 편안해 보인다.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영화제작전원사 제공
감희가 다음날 찾아간 곳은 수영(송선미)의 집이다. 필라테스 강사를 하며 돈 좀 모은 그는 최근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이사했다. 지금은 애인과 헤어지고 혼자인데, “새로운 남자가 관심을 보인다”고 털어놓는다. 새 인연을 피곤해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수영을 보며 감희는 “재밌게 사는 것 같다. 잘할 거다”라고 응원을 보낸다.
이후 영화관을 찾은 감희는 연락이 끊겼던 친구 우진(김새벽)을 우연히 만난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우진은 대뜸 감희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말한다. 둘은 얘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풀고 결혼 생활에서 느낀 속마음을 나눈다.
홍 감독의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도망친 여자>에 특별한 사건은 없다. 사람들이 만나 먹고 마시며 소소한 일상 얘기를 하는 게 기본 얼개다. 추세적으로 보면,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더 서사가 단순해지고, 점점 더 여성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도망친 여자>는 정확히 그 흐름 속에 있다. 남자들은 뒷모습으로만 등장하는데, 후반부에 나오는 정 선생(권해효)은 홍 감독 영화 속 전형적인 ‘지질한 남자’다. 관객은 여성들의 만남과 대화를 관찰하듯 영화를 보게 되는데, 이를 통해 느낄 정서적 공감 여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영화제작전원사 제공
홍 감독은 24번째 장편이자 배우 김민희와 일곱번째로 함께한 이 영화로 지난 2월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감독상)을 받았다. 카를로 샤트리안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우리가 어떻게 소통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인간 조건에 관한 영화”라고 전했다. 또 지난 2일(현지시각) 폐막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영화제 등 국외 영화제에 잇따라 초청됐다.
평단의 반응도 좋다. 미국 <할리우드 리포터>는 “인물들은 사소한 대화만 할 뿐 중요한 건 아무것도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믿겠지만, 관객은 서서히 커튼을 들추고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을 훔쳐보게 된다. 이것이 홍상수 영화의 비밀스러운 힘”이라고 호평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