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몸’으로 보여줬다…리얼리즘 거장 강요배의 추상세계

등록 2021-12-28 18:52수정 2021-12-29 02:31

강요배, 이인성미술상 수상전
대구미술관서 다음달 9일까지
강요배 작가가 올해 그린 신작 <코발트>. 아마천에 코발트 안료로 그린 가로세로 4m50㎝의 대작이다.
강요배 작가가 올해 그린 신작 <코발트>. 아마천에 코발트 안료로 그린 가로세로 4m50㎝의 대작이다.

이젠 살아 있는 거장이다. ‘제주의 화가’ ‘4·3 항쟁의 화가’로 불리는 강요배(68) 작가는 한국 화단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리얼리즘의 독자적 경지를 이뤄낸 최고 고수가 되었다. 그것은 다른 화가들이 움켜잡지 못한 여러 미덕을 오랜 세월 자기 수련을 통해 획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강 작가는 1980년대 참여미술운동의 선구가 된 ‘현실과 발언’ 동인에 가담하면서 민중미술이라 불리는 리얼리즘 화풍으로 시작했다. 이후 1988년 창간한 <한겨레>에 연재를 시작한 현기영의 소설 <바람 타는 섬>에 삽화를 실은 것을 계기로 제주4·3 항쟁의 현장을 수없이 답사하고 체험하면서 이른바 역사적 리얼리즘 서사를 그림에 펼쳐놓는 신산한 길을 개척했다. 이런 각고의 노력이 저 유명한 ‘제주민중항쟁사’ 연작과 4·3의 상징이 된 명작 <동백꽃 지다>로 열매 맺으며 4·3 항쟁을 국민적 기억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여기 머물지 않고 물과 바람으로 표상되는 제주의 자연과 풍정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그렸다. 오직 화면의 질감과 색감으로 표출하는 올 오버 페인팅, 모노크롬의 경지로 들어갔고, 이젠 고전 <주역>의 음양오행에 대한 사유가 대자연과 역사에 녹아들며 그만의 서사적 추상 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강요배 작 &lt;창파&gt;(2015).
강요배 작 <창파>(2015).

강요배 작가의 신작 &lt;대지 아래 산&gt;(2021).
강요배 작가의 신작 <대지 아래 산>(2021).

지난 10월부터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강 작가의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전 ‘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내년 1월9일까지)는 그가 한국 화단 최고 대가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신산한 역사와 시간의 길을 담은 대작과 세계 미술사를 주유하면서 섭렵한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오롯이 자신의 신구작들로 증거하는 기념비적 전시회다. 앞으로 국립미술관 같은 다른 대형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더라도 이 정도 작품들을 내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작가가 말할 정도다.

전시장 들머리 대작 &lt;코발트&gt; 앞에 놓인 작가의 자소상. 직접 진흙을 빚고 주물러 만들었다.
전시장 들머리 대작 <코발트> 앞에 놓인 작가의 자소상. 직접 진흙을 빚고 주물러 만들었다.

전시의 부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자 예수의 육화된 몸의 말뿌리인 ‘인카네이션’(incarnation)에서 따왔다. 출품작들을 관통하는 태도는 체화, 육화라고 미술관 쪽은 설명한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적 사건을 주된 화두로 평생 작업해온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몸’의 발현으로 확장된 그만의 추상세계를 보여준다는 의미다. 출품작 상당수는 지난해 이인성미술상 수상 확정 이후 그린 신작들로, 불과 1년 새 높이가 사람 키를 넘고 길이가 10m 넘는 대형 회화 작품들과 새로운 영상, 설치, 조소 작업 등 19점을 만들었다. 체화의 태도를 가장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작품은 전시장 들머리에 놓인 코발트빛의 색면추상 작품인 <코발트>다. 가로세로 4m50㎝의 대작은 전쟁 당시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아마천에 코발트 안료로 물들인 오직 그 색면만으로 극명하게 상기시킨다. 또 그 앞에 왜소하게 놓인, 작가가 스스로 빚은 자소상을 통해 역사적 현실 앞에 놓인 실존까지 표현하고 있다.

통창이 난 전시실 측벽에 걸린 &lt;수풍교향&gt;. 가로 길이만 15m가 넘는 대작이다. 지난 1년간 강요배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 제주 대자연의 풍광을 파노라마 형식의 반추상화 도상으로 담아냈다.
통창이 난 전시실 측벽에 걸린 <수풍교향>. 가로 길이만 15m가 넘는 대작이다. 지난 1년간 강요배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 제주 대자연의 풍광을 파노라마 형식의 반추상화 도상으로 담아냈다.

통창이 난 3층 전망 전시실 측벽에 걸린 <수풍교향>은 가로 길이만 15m가 넘는 대작이다. 지난 1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 제주 대자연의 풍광을 파노라마 형식의 반추상화 도상으로 담아냈다. 이외에도 <쳐라쳐라>(2021), <바비가 온 정원>(2021) 등 대작들과 사운드영상 설치물인 <소리풍경>은 작가가 제주의 자연과 역사 앞에서 느낀 사유와 체험의 몸짓, 제주의 바람에 흔들리고 간들거리는 것들이 일으킨 소리를 공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전통회화의 화조화풍으로 그린 유자 열매와 나뭇가지를 묘사하면서(<설향자>) 가지에 생긴 자글자글한 주름의 질감을 묽고 뻑뻑한 아크릴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며 작가의 주관적 감상을 표현한 부분은 경탄과 전율을 자아낸다.

강요배 작 &lt;설향자&gt;. 전통 회화의 소담한 문인화풍으로 그렸지만, 줄기의 자글자글한 질감 표현 등에서 작가 특유의 현대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강요배 작 <설향자>. 전통 회화의 소담한 문인화풍으로 그렸지만, 줄기의 자글자글한 질감 표현 등에서 작가 특유의 현대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의 특기라고 할 역사주제화 측면에서도 특유의 서사적 재현과 회화적 감각이 엿보이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1946년 대구 민중이 쌀 부족 사태와 친일 경찰의 행패에 들고일어난 10·1 대구 민중항쟁을 어두운 색감의 하늘 아래 대구부청 앞 광장에서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주로 운집한 항의 시위 장면들로 형상화한 <어느 가을날>이 그것이다. 대구 출신 거장 이인성이 전혀 다른 향토적 풍경으로 그린 1934년 작 동명 작품에서 제목만 따왔다는 점에서 독특한 역사적 오마주 회화를 만들어냈다. 이인성의 또 다른 대표작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오마주한 같은 제목의 신작 역시 비슷하다. 전국 곳곳의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현장에서 비탄에 젖어 얼굴을 싸안고 앉은 작가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역사주제화의 구도를 보여준다.

이인성 작가의 1930년대 대표작 제목을 딴 강요배 작가의 &lt;어느 가을날&gt;. 1946년 대구 10·1 항쟁을 극적인 구도로 형상화했다.
이인성 작가의 1930년대 대표작 제목을 딴 강요배 작가의 <어느 가을날>. 1946년 대구 10·1 항쟁을 극적인 구도로 형상화했다.

평생 심취한 주역의 사유 세계와 동서양 회화사 거장의 필력과 화풍을 두루 섭렵한 바탕 위에 새로운 추상의 세계를 펼쳐가는 작가의 장엄한 그림 여정이 집약된 전시장은 50년 강요배 회화의 결정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같이 열리고 있는 프랑스 마그재단과의 공동기획전 ‘모던 라이프’(내년 3월27일까지)에는 프랑스 국가문화유산인 샤갈의 대작과 콜더의 낯선 조형물들도 나와 또 다른 볼거리를 안겨준다.

대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대구미술관에서 강요배전과 함께 열리고 있는 기획전 ‘모던 라이프’의 대표작인 마르크 샤갈의 명작 &lt;인생&gt;(1964). 프랑스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마그재단 소장품이 처음 프랑스 바깥을 벗어나 한국에 왔다.
대구미술관에서 강요배전과 함께 열리고 있는 기획전 ‘모던 라이프’의 대표작인 마르크 샤갈의 명작 <인생>(1964). 프랑스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마그재단 소장품이 처음 프랑스 바깥을 벗어나 한국에 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