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에 공연한 ‘마지막 이야기꾼 전기수’ 정규헌씨
40년만에 공연한 ‘마지막 이야기꾼’ 정규헌씨

“대 이은 얘기장사 물려줄 사람 없으니…” 마지막 무대가 언제였던가. 1968년 고향 청양 부근이었으니 40년 만인 셈이다. 정규헌(71)씨는 청중들을 둘러보곤 이야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장화홍련전〉의 한 대목이었다. 판소리처럼 소리에 높낮이가 있어 처음 색다른 느낌도 잠시, 한복차림의 이야기꾼은 별다른 큰 몸짓은 없어도 조용한 대목은 조용하게, 날카로운 장면은 날카롭게 목소리를 조절하며 소설속 장면으로 청중들을 안내했다. 칠순 노인 같지 않은 또렷하면서도 낮게 퍼지는 목소리는 반세기전 전국을 누비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10여분에 불과한은 짧은 공연이었어도 그 감회는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감회에 젖은 노 이야기꾼의 눈가엔 잠깐 이슬이 맺혔다. 24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 뒷마당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색 무대가 펼쳐졌다. 전통 이야기꾼 ‘얘기장사’의 낭독 무대였다. 이날 낭독회는 옛 책들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재단법인 아단문고가 경인미술관에서 30일까지 여는 옛날 이야기책 전시회를 시작하면서 이젠 사라진 이야기꾼들의 낭독문화를 재현한 특별 무대였다. 조선 후기 소설이 꽃을 피우면서 새롭게 등장한 직업 이야기꾼들이 바로 ‘얘기장사’들이었다.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없던 시절, 서민들은 얘기장사들을 통해 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이야기 읽어주는 노인’이란 뜻의 ‘전기수’ 또는 ‘강독사’로도 불렸다. 판소리가 신명나는 카타르시스의 무대였다면, 얘기장사들의 낭독은 소설의 재미와 충효사상 같은 가치를 가르쳐주는 ‘에듀테인먼트’의 시간이었다.
대부분 전기수들은 장년층이었지만 정씨는 글 읽는 소리가 좋아 10대부터 이야기꾼으로 활동했다. 역시 전기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장삼이사들은 곡식으로라도, 또는 감사의 말뿐일지라도 따듯하게 이야기 들은 값을 치렀고, 정씨는 그게 좋아 이곳저곳 다니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근대화로 풀뿌리 문화가 사라진 뒤 고향으로 돌아가 회사원이 되었지만 그 시절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이야기에 가락이 얹어지는 점은 같지만 판소리와 달리 낭독은 고수가 없이 혼자 판을 이끈다. 이야기꾼은 음악이 아니라 이야기와 교훈을 전하는 문화적 존재였다고 정씨는 강조한다. “옛소설, 이게 교과섭니다. 어떤 것이든지 사필귀정, 고진감래 이런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데서 상식과 도덕, 예절 이런 것을 배웠던 거에요. 우리나라가 작은 나라지만 고래심줄같이 버티고 했던 것은 이런 문화의 덕택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풍습이 좋은 데 이야기꾼들도 일조를 한 거죠.” 그는 어쩌면 ‘마지막 전기수’일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다른 전기수가 있는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결국 아무도 못 만났다고 한다. 혼자 낭독문화를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정씨는 안타까워 했다. “세계에서 이렇게 음악적으로 읽는 나라가 있겠습니까. 듣는 사람 위주로 읽어주는 거지요. 얼마나 훌륭한 겁니까. 저같이 모자란 사람이 하는 바람에 이런 좋은 우리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지 못하는 것 같아 조상님들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영상 이규호 피디 recrom295@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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