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디밴드의 상징과도 같은 펑크록 밴드 크라잉넛 멤버들과 매니저 김웅(앉은 이)씨가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합주실에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있는 이들은 왼쪽부터 이상면(기타), 이상혁(드럼), 김인수(키보드), 한경록(베이스), 박윤식(보컬).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우리는 짝] 크라잉넛과 매니저 김웅
‘말 달리자’ 등 인기…펑크 팬 확장
음원 정액제 폐지 등 함께 팔걷어
‘말 달리자’ 등 인기…펑크 팬 확장
음원 정액제 폐지 등 함께 팔걷어
아무리 천재적인 음악가라도 혼자 힘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들다. 영국 밴드 비틀스도 그들을 발굴하고 잘 포장해 대중에게 알린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없었다면, 전설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밴드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자 ‘제5의 멤버’라 불린 엡스타인이 1967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이후 비틀스 멤버들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끝내 해체로 이어졌다.
한국 인디밴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펑크록 밴드 크라잉넛. 그들에게도 매니저가 없었다면 오늘의 ‘영원한 악동’은 없을지도 모른다. 1997년 처음 크라잉넛의 매니저를 맡은 이후 15년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김웅 드럭레코드 대표는 다섯 악동의 영원한 짝인 ‘여섯 번째 악동’을 자처한다. 이 여섯 악동을 지난 3일 서울 서교동의 어느 건물 지하에 자리잡은 크라잉넛 합주실에서 만났다. 널찍한 지하공간은 사무실과 녹음실까지 겸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타임머신을 타고 17년 전인 1995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중·고등학교 동창 사이인 박윤식·한경록·이상면·이상혁(두 이씨는 쌍둥이 형제다)은 대학입시 시험을 마치고 서울 홍대앞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클럽 ‘드럭’에 들어갔다. 마침 성기완·권병준·박현준 등이 토마토라는 밴드를 꾸려 공연하고 있었다. “와! 영화에서나 보던 클럽이 이런 곳이구나.”
그해 4월 다시 찾은 드럭에서는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 1주기 추모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무대 위 어느 밴드가 연주하던 악기를 바닥에 내리치는 순간, 객석에서 불쑥 뛰쳐나온 네 명의 악동이 기타니 앰프니 마구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이들의 미친 듯한 몸부림은 바닥 한켠에 쌓아올린 맥주캔 무더기를 향한 다이빙으로 이어졌다. 드럭은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석문 클럽 사장이 물었다. “니들, 뭐하는 놈들이냐?” “저희도 얼터너티브 밴드 하는데요.” “그래? 오디션 보러 와라.” 네 악동은 연락처를 남기고 클럽을 나왔다. 그러곤 그 일을 잊어버렸다.
한 달 뒤 연락이 왔다. “야, 오디션 보러 왜 안 와?” “누구세요?” “드럭 사장이야. 얼른 튀어 와!” 말이 밴드지, 담당 악기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했던 네 사내는 기타 셋에 드럼 하나의 특이한 편성으로 오디션 무대에 올랐다. 기타를 든 세 사내가 엉성한 연주와 함께 너바나, 스매싱 펌프킨스, 그린데이 등의 노래를 번갈아가며 마이크를 잡고 불렀다. 이를 보던 이 사장이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우리 클럽에서 계속 공연해라.”
그렇게 몇 주 공연을 했다. 어느 날 이 사장이 말했다. “너희들은 연주력이 안 되니 펑크로 가라. 윤식이가 얼굴이 그나마 반반하고 기타도 제일 못 치니 보컬을 하고, 경록이는 기타 말고 베이스를 쳐.” 그렇게 크라잉넛의 기본 라인업이 갖춰졌다(건반 연주자 김인수는 99년 합류했다). 96년 같은 클럽에서 연주하던 밴드 옐로우키친과 함께 공동앨범 <아워 네이션 1>을 발표했다. 드럭레코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한국 인디 음반의 효시와도 같은 데뷔작이었다.
이듬해인 97년 김웅 매니저와 만났다. 홍대앞에서 공연 기획과 홍보 일을 하던 그를 눈여겨본 이 사장이 영입한 것이다. “웅이 형을 처음 봤을 땐 머리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었어요. 지금이야 살집이 붙었지만, 그땐 엄청 말랐었죠. 긴 머리 휘날리며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전화받고 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네요.”(박윤식) “방송국에 들어가니까 어느 나이 든 피디님이 그러더라고요. ‘네가 가수야? 왜 네가 머리를 길러?’ 그래도 꿋꿋하게 버티다가 10년 전에 스스로 지겨워져서 머리를 잘랐죠.”(김웅)
김 매니저는 인디 쪽에서는 처음으로 방송사에 음반을 돌리며 홍보를 시작했다. “방송국에 처음 시디 들고 들어갔더니, 피디들이 음악 듣고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이거 어떻게 틀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펑크라는 음악인데요…’ 하며 설명했죠. 그나마 들어보기라도 하면 다행이죠. 큰 기획사 아니면 시디를 들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죠. 방송국에 계속 얼굴 들이밀며 친해지니까 그제야 크라잉넛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라고.”
웅이형은
“홍대에서 매니저 일 제일 잘해
사람 엮어 새로운 것 잘 만들어” 크라잉넛은
“약속 까먹고 만취 노숙 사고쳐도
대형기획사에 안가고 속정 깊어” 98년 발표한 1집 타이틀곡 ‘말 달리자’의 히트로 대중에게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형 기획사로부터 끊임없이 영입 제의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크라잉넛 멤버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상면은 어느 대형 기획사로부터 받은 명함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기도 했다. “좀 떴다고 해서 우리를 만들어준 사장 아저씨와 웅이 형을 떠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김 매니저는 이렇게 떠올렸다. “드럭레코드가 크라잉넛 음반 팔아 번 돈으로 다른 후배 밴드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친구들은 ‘우리가 드럭(레코드)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어요. 당시 회사와 크라잉넛을 이간질하려고 안 좋은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오히려 회사 걱정을 해줬다니까요. 보기와 달리 참 속 깊은 친구들이죠.” 초창기에는 밴드도 매니저도 좌충우돌을 많이 했다고 이들은 말했다. 박윤식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웅이 형이 운전을 못했거든요. 그래서 운전 가능한 지인이 빨간색 르망을 운전하고 웅이 형은 조수석에 탔어요. 우리 넷은 뒷자리에 꾸겨 앉았고요. 인터뷰를 하러 시내로 가는 도중 웅이 형이 길을 잘못 안내해 엉겁결에 강변북로를 탔어요. 한참을 달리다가 ‘자유로’라고 적힌 표지석을 보고는 얼마나 황당하던지.” 이런 일도 있었다. 밴드 멤버들이 약속시간에 늦는 일이 잦아지자 김 매니저는 머리를 썼다. 오후 2시 인터뷰 약속이 잡히면 멤버들에게는 낮 12시라고 얘기하는 식이다. 그러자 멤버들이 거꾸로 머리를 굴렸다. 낮 12시에 모이자고 하면 실제 약속시간을 짐작해 오후 4시에 나타나는 식이다. 다음에 김 매니저는 약속시간을 5시간 앞당겨 말하고, 멤버들은 이를 추측해 더 늦게 나타나고 하는 식의 머리싸움이 계속됐다. “지금은 서로 약속 잘 지켜요.” 술 때문에 생긴 사건도 많다. 아침에 연락이 잘 안 되는 멤버가 있으면 김 매니저는 아파트 단지를 찾아가 잔디밭부터 살펴본다. 만취한 상태에서 집앞 잔디밭에 쓰러져 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경록은 공원에서 쓰러져 자다 눈을 떠보니 개가 자신의 입 주위에 묻은 음식물을 핥고 있었고 주위에 비둘기들도 모여 있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담아 ‘비둘기’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웅이 형도 워낙 술을 좋아해서 우리를 말리기보다는 같이 술을 마시죠. 술 먹고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싸우다 경찰서 간 적도 많아요.” 크라잉넛 네 멤버가 2002년 말 동반입대를 했을 때, 김 매니저는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델리스파이스 매니저를 하며 5집 수록곡 ‘고백’이 크게 히트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녹음 스튜디오도 하나 차리고 공연 기획 일을 하며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큰돈을 들여 기획한 공연이 실패하면서 빚더미에 나앉게 됐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단칸방으로 옮겨 다시 일어설 날을 꿈꿨다. 2005년 제대한 크라잉넛이 그를 다시 찾았다. 매니저로 돌아간 그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2008년 드럭레코드의 이 사장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평소 꿈꿔온 연극배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즈음 한 대형 기획사가 크라잉넛에게 영입 제안을 해왔다. 고민에 빠진 멤버들은 이 사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 사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웅이만큼 너희를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니? 무조건 웅이랑 같이 가야 한다.” 크라잉넛은 드럭레코드에 남기로 결심했고, 김 매니저는 회사 대표가 됐다. “크라잉넛의 결정이 참 고마웠어요. 사실 저는 크라잉넛이 대형 기획사로 옮길 걸로 보고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이제 크라잉넛은 단순한 소속 밴드가 아니라 회사의 주주이자 주인이에요.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밴드와 상의해서 하죠. 그야말로 생사를 같이하는 한 식구입니다.” “웅이 형이 홍대앞 인디음악계에서 매니저 일을 제일 잘해요. 술자리에서 이리저리 사람들 엮어서 새로운 뭔가를 참 잘 만들기도 하고요. 어떤 매니저 보면 밴드에게 뭔가 자꾸 숨기면서 악용하는 경우도 꽤 있던데, 우리 사이엔 그런 거 없어요. 서로를 완전히 믿는 거죠.” 한경록의 말에 김 대표는 “그러고 보니 우린 계약서를 한번도 안 썼네. 웬만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죠”라고 맞장구를 쳤다. 김 대표는 요즘 회사 일 말고 다른 일에도 부쩍 신경을 쓰고 있다. 인디음악계 음반 판매순위와 동향을 담은 소식지 <인디고 차트>를 격주마다 발행하고 있으며, 최근엔 온라인 음원 저가형 정액제 폐지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매니저가 다른 일을 벌이는 게 신경쓰이지 않느냐고 묻자 한경록은 “괜찮아요. 웅이 형도 그렇고 우리 밴드도 그렇고 이제는 인디음악계 전체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할 때죠”라며 웃었다. 그는 음원 정액제 폐지를 위해 크라잉넛도 적극 나설 생각이라고 했다. “2010년 크라잉넛 데뷔 15돌 기념공연을 했어요. 이제 내가 할 일은 멤버들이 데뷔 20돌, 30돌, 40돌이 되도록 계속 활동해 ‘한국의 롤링스톤스’ 같은 장수 밴드가 되도록 지켜주는 거라고 생각해요.”(김웅) “맞아요. 잘 버텨야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한 거라는 말도 있잖아요. 밴드랑 매니저랑 서로 힘을 합쳐 잘해나가 인디밴드로서 새로운 족적을 남겨야 다른 밴드들도 희망을 갖지 않겠어요?”(한경록) 마지막으로 홍대앞 다른 밴드와 매니저들에게 하고 싶은 말 없느냐고 묻자 이들은 입을 모았다. “밴드가 처음에는 버벅대다가도 시간이 갈수록 연주가 좋아지는 것처럼 매니저도 마찬가지예요. 밴드와 매니저가 같이 성장하면서 결국 빛을 보는 법이거든요. 어떤 밴드를 보면 매니저가 일을 제대로 못한다며 수시로 옮겨다녀요. 밴드와 매니저가 서로를 알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계속 바꾸면 언제 서로를 알고 언제 잘해나가겠어요. 능력도 능력이지만 끈끈한 관계와 믿음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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