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계의 ‘단짝 소리꾼’인 남상일(왼쪽)씨와 박애리씨는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주요 창극에 남녀 주인공을 도맡아 왔다. 두 사람은 “판소리의 비판과 풍자, 해학 정신을 오늘에 살리는 것이 우리 소리꾼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우리는 짝]
국립창극단 선후배 박애리-남상일
국립창극단 선후배 박애리-남상일
판소리의 유명한 ‘눈대목’(가장 감동적인 대목)을 듣는 느낌이다. 이름하여 ‘박애리와 남상일이 만나는 대목’이라고 할까? 소문난 소리꾼들답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입담이 여간 아니다.
국악계의 ‘최불암·김혜자’로 불리는 젊은 소리꾼 박애리(36)씨와 남상일(34)씨 짝꿍. 두 사람이 대뜸 치고 나온다.
“저희는 아직 그분들처럼 유명하지 않아요. 게다가,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희가 훨씬 젊잖아요. 오히려 국악평론 하는 현경채 선생이 붙여준 ‘국악계의 비’와 ‘국악계의 이효리’가 더 듣기 좋은데요.(웃음)”(박애리)
“저희에게 ‘국악계의 아이돌’이라고들 하는데요. ‘국악 세트’나 ‘국악 한 묶음’이라는 별명도 어울리지 않을까요?”(남상일)
지난 17일 오후, 국립창극단이 들어 있는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국립창극단의 4년차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주요 창극에서 ‘이몽룡과 춘향’, ‘심봉사와 심청’ 같은 남녀 주인공을 도맡아 왔다. 박애리씨가 199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고 2003년 남상일씨가 들어온 뒤 <춘향>, <적벽>, <수궁가>, <흥보놀보>, <청>, <배비장전> 등 국립창극단의 대표 작품들에서 주역으로 찰떡궁합을 자랑했다. 오죽하면 인간문화재 박송희씨가 두 사람의 ‘사랑가’ 공연을 보고 “너희 둘은 정말 보기 좋다. 앞으로도 절대 떨어지지 말고 둘이 세트로 다녀라”고 했을까.
창극단 ‘프리마돈나’ 박애리
국악경연대회 대상 휩쓴 젊은 명창
요즘 TV ‘불후의 명곡’ 출연 인기
“대중이야기 속시원히 대변하는 게
지금 시대에 주어진 숙제라 생각…
상일씨와 무대 재밌어 깔깔 웃어요”
박애리씨는 “바깥에서 섭외가 올 때도 꼭 저한테 전화를 해서 상일씨 스케줄을 물어본다든지, 상일씨한테 전화를 해서 박애리씨 스케줄을 알아봐 달라고 한다”고 너스레를 쳤다.
남상일씨는 전북 전주에서 이름난 소리 신동 출신이다. 명창 조소녀·안숙선씨 등에게 소리를 배운 그는 9살에 제1회 전국어린이판소리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1999년 동아국악콩쿠르 판소리 일반부 금상을 거머쥐며 국악계의 재목으로 떠올랐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박애리씨는 안숙선 명창의 뒤를 잇는 국립창극단의 ‘프리마돈나’로 평가받는 소리꾼이다. 안애란, 성우향, 안숙선, 김경숙씨 등을 사사하고 17살이던 1994년 전주 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부문 장원을 차지했고, 96년 동아 국악콩쿠르 일반부 판소리 부문 금상을 받으며 싹수를 보였다. 박씨는 2011년 2월 2살 연하의 춤꾼 팝핀현준과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창이면 창, 춤이면 춤, 연기면 연기, 입담이면 입담 못하는 게 없다. 무대에 오르면 척척 호흡이 맞는다. 박애리씨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지만 저희 둘은 서로의 머리를 파르라니 잘 깎아준다”고 말했다. 남상일씨는 “애리 누님과 같이 무대를 서게 되면 없던 에너지도 나온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눈빛만 봐도 다 알 수 있어요. 애리 누님이 저에게 눈짓을 하면 속으로 ‘아, 이쪽으로 가라는 이야기구나’(웃음) 하고 알죠.”
“저희 둘이 무대에 서면 그냥 재미있는 거예요. 상일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 거기서 제가 한마디 해서 원래 가야 할 방향으로 갔다가, 또 상일씨가 재미있게 막 풀어주면 거기서 저도 깔깔깔 같이 웃다가 해요. 상일씨와 무대에 서면 제가 관객이 되었다가 같이 동업하는 배우가 되었다가 하는 그런 느낌이에요.”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서로의 소문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박애리씨는 “저에게 소리를 가르치시던 안애랑 선생께서 ‘아유, 전주에 남상일이라는, 아유 그걸 어쩌면 좋으냐, 남잔데 이쁘게 생긴데다가 소리도 잘하고 북도 잘 치고’라고 하시기에 ‘아, 남상일이란 친구가 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고 했다.
둘이 처음 만난 건 1994년 제12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다. 이 대회에서 박씨가 학생부 장원을, 남씨가 장려상을 받았다. 남씨는 “그때 애리 누님이 소리를 했는데 관객이며 심사위원이며 할 것 없이 그냥 ‘1등은 박애리’라고 꼽더라. 그때 ‘야, 저렇게 소리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놀랐다”고 떠올렸다.
두 사람은 그 뒤로 소리판에서 부딪혔지만 서로 통성명을 제대로 하지도 않은 채 ‘논두렁 대화’를 하면서 친숙해졌다고 했다.
“다른 소리꾼이 소리하는 걸 보다가 상일씨가 ‘누님, 저 사람 잘하네요’ 그러면, 제가 ‘그렇지’ 하고 논두렁 대화를 한 거예요.(웃음)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아유, 저 집은 농사를 잘했네’, ‘그러게 말이여’ 이러면서 하는 것을 논두렁 대화라고 하지요.”(박애리)
‘소리신동’ 이름 날린 남상일
9살 때부터 판소리대회 장원 꿰차
TV프로서 명박산성가 불러 화제
“판소리야말로 시대 담는 그릇
세태 풍자와 해학이 소리꾼 소명…
누님과 무대선 없던 에너지 솟아”
“그렇게 논두렁 대화를 하면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온 것처럼 익숙하고 친근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소리판이나 무용판, 연주판에서 만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같이 소리도 하고 장단도 치고 하면서 더 친해졌어요.”(남상일)
처음 두 사람이 입을 맞춘 것은 1999년 일본 오사카 공연 때였다. 당시 한 재일동포 무용가가 발표회를 하면서 한국의 예술가를 초청해 공연을 꾸몄다. 그때 두 사람은 판소리 <춘향가>의 눈대목인 ‘사랑가’로 처음 호흡을 맞췄다. 연기하며 창을 하는 ‘입체 창’으로 ‘사랑가’를 공연했다. 그 뒤 두 사람의 ‘사랑가’는 더욱 인기를 끌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5년 1월 청와대 신년 만찬회, 2006년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서 열린 한국-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행사 등 주요 공연에서 빠질 수 없는 국악 레퍼토리가 되었다.
“제 시어머니께서 상일씨 팬이랍니다. ‘상일이 왜 우리 집에 안 놀러 오니? 맛있는 밥 해줄 텐데’ 하세요. 또 제 남편 현준씨도 공연을 기획하면서 함께하고 싶은 명단 목록에 상일씨를 ‘0순위’로 올립니다.”(박애리)
두 사람은 몇해 전부터 판소리 대중화를 위해 창작 판소리 제작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판소리에 현재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시사 판소리’를 만들어 발표했다.
박씨는 “대중들하고 호흡할 때는 오늘의 이야기를 하면 훨씬 공감을 잘 해주시더라”고 말했다. 남씨는 “판소리야말로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시사 판소리는 우리 소리를 제대로 들려주기 위한 가교 구실을 한다”고 강조했다.
남상일씨는 2008년 6월 미국 쇠고기 수입 파문으로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한국방송>(KBS) 프로그램 <생방송 시사투나잇>에서 시사 판소리 ‘명박산성가’를 선보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시위대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 컨테이너박스를 쌓아올린 ‘명박산성’을 풍자해서 “소통 소통 하던 양반이 아 고로코롬 뒤에 숨어불문 아 요거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라고 일갈했다.
박애리씨의 시사 판소리 ‘월매 사모가’도 유명하다. 춘향의 어머니인 ‘월매’가 서울에서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보고 들은 한국의 빈부 격차와 고액 족집게 과외 이야기를 소리로 풀어놓아 가진 자들의 비뚤어진 교육열을 꼬집는 작품이다.
남씨는 “국악계에서 시사 판소리를 하는 저희의 모습을 보고 (정통 판소리가 아니라며) 우려하는 어른들이 많이 계신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젊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씨도 “스승들께서는 정말 더 좋은 명창이 될 수 있는 재목들이 평생을 해도 모자랄 소리 학습을 게을리하게 되면 어떡하나 우려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지금 저희에게 주어진 소명이나 숙제는 대중들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거들었다.
남씨는 요즘 <한국방송>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이경규, 김태원, 윤형빈씨 등 출연진에게 창극을 지도해서 오는 2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창극 <흥부전>을 올린다. 그는 “어설프지만 이런 모습들이 널리 알려지면 판소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홍보 효과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씨도 요즘 같은 방송사의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첫 출연에서 대중가요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판소리 느낌으로 불러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26일 방송 예정인 두번째 출연에서는 해금과 가야금 선율로 가수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을 불러서 호평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구나,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예부터 판소리는 가난한 사람들, 민중들의 이야기를 대신 시원하게 해주었거든요. 안 보이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다 한다잖아요.(웃음) 어떻게 보면 그런 행위는 마냥 탓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풀어내고 달래주는 작용을 했다고 해요.”(박애리)
“판소리 안에 풍자와 해학이 다 들어 있거든요. 간단한 예로 <춘향가> 가운데서도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서 거지 복색을 하고 내려오잖아요. 그래서 민정을 살핀다고 농부들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면 “우리 남원은 사판이다. 어찌하여 사판인고? 우리 고을 사또는 노름판이요, 거부 장자들은 베끼는 판, 육방관속들은 먹을 판 났으니 우리 백성들은 죽을 판이로다”고 합니다. 그 판소리 안에 들어 있는 풍자와 해학의 정신을 살려내는 게 바로 우리 소리꾼의 소명이 아닌가 싶어요.”(남상일)
남상일씨는 “더 다양한 공연활동을 하기 위해” 오는 2월에 국립창극단을 떠난다고 한다. ‘섭섭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깔깔거렸다.
“제가 결혼하기 전에 상일씨에게 ‘우리는 나중에 한 동네 이웃집에 살자, 우리 서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서도 식구끼리 저녁도 같이 먹고 서로 오가면서 친하게 지내자’고 이미 약속했어요.”(박애리)
“국악 세트가 어디 가겠어요. 애리 누님과 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묶음이잖아요. 앞으로 더 재미나고 다양한 작품을 보여줄 터이니 기대하세요.”(남상일)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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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씨와 무대 재밌어 깔깔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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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 풍자와 해학이 소리꾼 소명…
누님과 무대선 없던 에너지 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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