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리랑 랩소디>
연극 ‘아리랑 랩소디’
일제강점기의 어느 가난한 시골에 떠돌이 ‘유랑극단 아리랑’이 찾아들었다. 단막극 <아리랑>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가난과 일본 경찰의 폭압에 시달리던 마을 사람들의 눈이 뒤집혔다. “매일 체포다, 부역이다, 정신대다, 하는 판에 연극을 하겠다고? 완전히 미친놈들이구나.”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야? 지금 온 나라가 초상집인걸 몰라?” 배우들은 첫날부터 흠씬 뭇매를 맞는다.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 중인 극단 진일보(대표 김경익)의 창단 연극 <아리랑 랩소디>는 각박한 현실에서 연극의 존재가치를 묻는다. 그 물음은 오늘의 현대사회에도 유효하다. 또 비단 연극만이 아니라 첨단과학기술과 시장경제의 논리에 질식되고 있는 기초예술과 인문과학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연극은 고사목처럼 말라있던 나무 ‘줄인형’이 아리랑 선율에 젖어 살아나면서 공연의 막을 올린다. ‘유랑극단 아리랑’ 배우들은 마을 사람들의 온갖 비난과 일본경찰의 방해와 감시 아래에서 <아리랑> 공연을 올린다. 악랄한 조선인 경찰서장 ‘오기호’의 흉계에 미모의 단원 ‘춘심’이 볼모로 잡히는 조건이다. 그러나 공연은 조선인 고문기술자 ‘박살제’가 여배우 ‘춘심’을 구하려고 뛰어들면서 난장판이 된다. 그 과정에서 ‘오기호’와 ‘박살제’, 남자 주인고 ‘오희준’이 오발사고로 죽고, 지역사령관을 암살한 혐의로 감옥에 갇혔던 고교생 ‘갑수’가 풀려난다.
마침내 ‘유랑극단 아리랑’ 배우들이 마을을 떠날 무렵 ‘갑수모’가 달려와 용서를 구한다. “난 연극의 연자도 모르는 까막눈 촌년이오. 그래도 내 새끼 살려준 은인은 알아봅니다. 연극이 우리 갑수를 살린 거예요. 연극이!” 그러자 단장 ‘박승희’가 대답한다. “우리는 이 세상 길을 유랑하면서 연극을 하고, 당신은 여기 남아서 당신 인생을 연기하는 거죠. 다 똑같아요.”
두 사람의 짧은 대화에 이 연극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와 답이 담겨있다. 연극 <아리랑 랩소디>는 세상이 단순히 경제적인 효용성이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로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모진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제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힘과 가치를 상기시킨다. 이 연극에서 자신의 극중 역할에 몰입한 나머지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하는 주인공 ‘오희준’이 그런 인물이다. 이 ‘바보 광대’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마을에 평화를 불러오고 사람들이 연극을 이해하게 만든다. 세상은 그런 보통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희생이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세계 2차대전 나치 하의 세르비아를 배경으로 한 원작 소설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일제강점기의 시대 상황과 인물, 사건 등으로 재창작한 김경익(45) 연출가와 그의 스승 이윤택(61·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씨의 탄탄한 각색 솜씨가 빼어나다. 특히 원작의 극중 극에 등장하는 희랍극 <엘렉트라>의 살인 장면을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나운규 <아리랑>과 악극으로 대체해 감칠맛을 살렸다.
연출가 김경익씨는 이윤택씨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에서 12년간 연출과 연기로 잔뼈가 굵은 연극인이다. 연극 <봄날은 간다>에서 연출과 연기로 동아연극상 작품상·무대 미술상·남자연기상을 수상했고, 영화 <타짜>에서 빨치산 역으로 눈길을 집중시킨 배우이다.
이 연극에서는 김병철·김진근(오희준 역), 장재호·김동혁(박살제), 이남희·최명경(박승희 단장), 황석정(나영자)씨 등 출연 배우들의 몸을 아끼지 않는 열연과 앙상블이 돋보인다. 또 아리랑 선율을 다양하게 변주해낸 최우정(서울대 작곡과 교수)씨의 음악도 극의 정서와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오희준’의 분신인 ‘줄인형’을 마임으로 선보인 한국 1세대 마임이스트 김성구(62·김성구 마임극단 대표), 공연 시작 전 배우들의 차력과 코믹 퍼포먼스는 또다른 볼거리다.
다만 ‘박살제’가 사람들을 고문하고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그를 죽이러 가는 과정이 다소 긴 듯해서 긴장감이 떨어진다. ‘인생은 연극이고 세상이 무대’라는 주제를 강조하다보니 ‘오희준’이 연극 <햄릿>의 대사를 인용하는 독백 장면이 지나치게 반복되는 감이 있다. 그리고 극의 성격상 450석 규모의 중극장보다는 120석 규모의 소극장 무대에 올렸더라면 극의 짜임새가 좀 더 조밀했을 성싶다. 11일까지. 070-4231-3468.
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사진 극단 진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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