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우 첼리비다케
[문화‘랑’] 35년 재임한 카라얀, 만년 후보 바렌보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결합은 곧잘 결혼에 비유되는데, 심지어 얄궂은 상황까지도 그렇다. 한창 혼담이 오가던 중에 신부(오케스트라)가 궁합이 더 잘 맞는 신랑감(지휘자 후보)을 찾아 마음을 바꾼다든지, 소문난 잉꼬부부(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갈등 끝에 결별에 이르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진다.
20세기 전반 베를린 필의 영화를 이끈 거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가 세상을 떠난 뒤, 베를린 필은 다급하게 후임자를 찾았다. 나란히 물망에 오른 인물은 세르지우 첼리비다케(1912~1996, 오른쪽 위 사진)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 아래 사진)이었다. 첼리비다케는 푸르트벵글러의 신임을 받았고 순회 연주를 함께 한 경험도 있어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가 푸르트벵글러의 사망 당일에 권위적인 태도로 베를린 필 단원들을 비난하는 사건이 벌어져, 카라얀에게 계약서가 넘어갔다.
카라얀은 이후 무려 35년 동안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으로 재임하며 황금기를 누렸다. 방송, 음반 녹음 등 미디어 마케팅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고 종신 음악감독 자격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독단적인 리더십은 단원들의 반감을 불렀다. 1980년대 초반, 여성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53)의 영입 문제로 단원들과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치달았다. 카라얀이 최소한의 연주 외에 흥행을 위한 순회공연, 음반 녹음, 페스티벌 참가 등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하자, 단원들은 새 지휘자를 물색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카라얀은 80년대 중반 이후 베를린 필과 ‘별거’한 상태로 빈 필과 더 많이 연주를 했고, 1989년 빈 필 미국 투어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71)은 카라얀이 재임하던 시절부터 로린 마젤(83), 리카르도 무티(72) 등과 더불어 베를린 필의 차기 음악감독 후보로 언급됐다. 푸르트벵글러를 연상시키는 독일 정통 스타일의 지휘와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등 독일 작곡가들의 음악에 천착해온 경력 때문이다. 하지만 1989년 악단 역사상 첫 단원 투표로 선출된 것은 클라우디오 아바도(80)였다. 그 뒤에도 바렌보임이 베를린 필의 차기 수장이 될 거라는 소문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1999년 투표에서 단원들은 영국 출신의 젊은 지휘자 사이먼 래틀(58)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여전히 바렌보임은 객원 지휘나 투어 등을 통해 베를린 필과 좋은 ‘만남’을 유지하고 있지만, 완전한 ‘결합’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김소민 객원기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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