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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랩 배틀, 음악경쟁으로 돌아오라

등록 2013-08-26 19:40수정 2013-08-26 20:31

김봉현 대중음악비평가
김봉현 대중음악비평가
기고 l 김봉현 대중음악비평가

래퍼 이센스의 도발로 배틀 커져
전소속사와 가수간 갈등 부각
힙합수준 올리자 취지 빛바래

지난주를 거치며 국내 래퍼들 사이의 랩 전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래퍼 스윙스와 이센스가 디지털 싱글로 발표한 랩으로 다른 래퍼들을 도발하자 노래에서 언급된 개코(다이나믹 듀오)와 쌈디가 역시 랩으로 응수하면서 대중적 관심사가 됐다. 대중음악비평가 김봉현씨가 랩 배틀, 그리고 힙합신(계)의 문화에 대해 분석했다.

요 며칠 래퍼들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를 채우고 있다. 한국 래퍼끼리의 ‘랩 배틀’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힙합신을 넘어 전국구 규모로 화제가 된 적은 없었다. 랩 배틀이란 말 그대로 랩으로 싸움을 벌이는 걸 말한다. 에미넴이 주연한 영화 <8마일>을 연상하면 쉽다. 랩 배틀에 임하는 래퍼는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다양한 비유와 때로는 직설을 동원하며, 그것들은 주로 자신의 강점과 상대의 약점에 기반을 둔다.

이번 사태(?)에 대해 논하려면 일단 2주 전 미국으로 시계를 돌릴 필요가 있다. 캘리포니아 출신 래퍼 켄드릭 라마의 가사가 발단이 됐다. 켄드릭 라마는 동료 래퍼 빅 숀의 ‘컨트롤’이라는 곡에 참여해, 현재 미국 힙합신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래퍼 10여명을 거론하며 이렇게 일갈했다. “난 너희들을 존중해. 하지만 난 지금 랩으로 너희들을 죽이려고 하고 있지. … 경쟁이란 게 뭔지 알아? 난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 싶다구.”

켄드릭 라마의 이 가사로 미국 힙합신은 난리가 났다. 힙합 거장 닥터 드레의 총애를 받으며 힙합의 미래로 불리는 이 젊은 래퍼의 거대한 도발에 자극받은 래퍼들은 저마다 앞다퉈 자신의 반응을 곡으로 내놓았다. “켄드릭 라마가 상업화·여성화돼가던 힙합에 경종을 울렸다”, “멸종돼가던 래퍼들의 작가주의에 다시 불을 질렀다”, “힙합이 다시 흥미로워지고 있다”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며칠 뒤 한국에서 래퍼 스윙스가 켄드릭 라마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컨트롤’의 비트를 이용한 ‘킹 스윙스’라는 곡을 발표하며 한국 힙합 전체를 겨냥했다. 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야, 왜 이렇게 뒤에서 못 따라오냐 너네.” 수많은 한국 래퍼가 이 도발에 기꺼이 응해 경쟁에 참여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힙합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이들에겐 이런 광경이 잘 이해가 안 가거나 못마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랩은 본래 경쟁적 면모와 공격적 태도를 중요한 유전자 중 하나로 지닌 예술양식이다. 실제로 랩의 전통적인 1인칭 시점에서 비롯된 자기 고백적 특성과 나르시시즘, 서로를 향해 악담을 퍼붓는 ‘더즌 게임’과 상대방의 엄마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요 마마 조크’를 위시한 미국 흑인 사회의 몇몇 구술 전통, 고대 그리스와 중세 스코틀랜드의 ‘시적 언쟁’ 등이 랩 배틀을 형성해온 복합적인 기원으로 꼽힌다. 이런 맥락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 없이 랩을 도덕과 윤리로만 평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지금 한국 상황은 미국 사례와는 조금 다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터넷 매체에서 진실공방과 폭로전쯤으로 다뤄지며 가장 부각되고 있는 이센스와 개코(다이나믹 듀오) 간의 랩 배틀은 사실 ‘정당한 경쟁으로 실력의 우위를 가리고 힙합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자’는 켄드릭 라마의 취지와 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이센스의 입장에서는 예술을 자기 본위로 놓고 싶은 예술가와 그것을 방해하는 지저분한 비즈니스 세계의 충돌이고, 개코의 입장에서는 힙합음악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한국 대중음악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자신의 역사가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에 대한 분노다(다이나믹 듀오가 설립한 음반사 아메바컬쳐 소속이었다가 얼마 전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이센스는 랩으로 회사와 개코를 공격했고, 개코 역시 랩으로 이를 맞받았다). 이번 랩 배틀에 참여하기도 했던 래퍼 딥플로우의 말처럼 둘의 배틀은 이제 “더이상 음악적인 게임이 아니게” 됐다.

언론은 누가 더 훌륭한 표현과 기술을 구사했는지보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에만 관심이 있고, 대중은 더 강렬하게 싸우기를 요구하면서도 사태가 일단락되기도 전에 아마 이 일을 잊어버릴 것이다. 거기에다 아메바컬쳐는 이센스에 대한 회사 차원의 대응 방침을 밝혔다. ‘음악 밖의’ 대응인 셈이다. 고로 힙합 팬이 바라던 ‘음악적 경쟁’은 이제 온전한 모양새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됐다. 찝찝한 뒷맛이다.

김봉현 대중음악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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