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구텐버그>는 인쇄기를 개발한 구텐베르크가 원래는 와인제조가였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단 2명의 배우가 20명이 넘는 인물을 연기하며, ‘뮤지컬 리딩’(투자자들 앞에 대본을 읽는 것)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쇼노트 제공
[문화‘랑’] 문화인
겉치레 걷어내고 연기로 승부
몸으로 때우는 ‘리딩형식’ 공연
겉치레 걷어내고 연기로 승부
몸으로 때우는 ‘리딩형식’ 공연
회전하는 거대한 무대장치도, 15세기를 고증한 화려한 의상도, 웅장한 오케스트라나 밴드도 없다. 무대 위에는 단 2명의 배우와 모자 수십개, 어설픈 소품 몇 가지가 놓여 있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연주자 1명이 앉아 있다. ‘티켓값 하는’ 뮤지컬을 기대했다면 처음엔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치레를 걷어내고 배우들의 연기력과 연출력만으로 승부를 건 <구텐버그>는 뮤지컬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텐버그>는 인쇄기를 발명한 중세 인물 구텐베르크가 원래는 독일 시골 마을 슐리머의 와인제조가였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브로드웨이 진출을 꿈꾸는 뮤지컬 작가 버드(송용진·장현덕)와 더그(정상훈·정원영)는 와인제조가인 구텐베르크가 글을 읽지 못해 괴로워하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포도 압착술을 이용한 인쇄기를 발명하게 됐다는 내용의 뮤지컬 대본을 완성한다. 하지만 화려함으로 무장한 브로드웨이에서 이들의 작품은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이들은 관객들과 직접 만나는 한편 혹시 관객 중에 투자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며 ‘리딩 공연’을 연다. 무대장치도, 소품도, 배우도 없이 둘이서 모든 연기를 펼친다. 버드와 더그의 이야기와 구텐베르크라는 극중 인물의 이야기가 교묘히 교차하는 ‘액자식 구성’의 공연인 셈이다.
<구텐버그>의 힘은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없이 몸으로 때우는 ‘리딩 형식’이라는 공연의 형태다. 버드와 더그는 출연 배우의 이름이 적힌 모자를 쓰고 20명이 넘는 인물을 연기한다. 얼굴 표정, 목소리, 몸짓만으로 20명 넘는 인물을 겹치는 캐릭터 없이 소화해내는 배우의 역량이 다소 단조로울 수 있는 리딩 공연의 여백을 메운다. 다 큰 남자들이 온몸을 배배 꼬고, 목소리를 높여 ‘가슴만 크고 무식한 헬베티카’나 ‘유대인을 싫어하는 꽃 파는 소녀’를 연기할 땐 폭소가 터진다. 모자를 여러개 쓰거나 손에 들고 1인2역은 물론 1인4~5역의 앙상블까지 소화하는 이 ‘멀티 배우’들은 땀에 흠뻑 젖는 열연을 펼친다. 실수조차 대본에 있는 것처럼 묻어가는 애드리브와 피아노 앞에서 때론 멜로디언과 퍼커션까지 연주하는 1인 오케스트라 ‘찰스’는 작품의 보너스다.
<구텐버그>의 또다른 힘은 치밀한 연출에서 나온다. <스위니 토드>, <지킬 앤 하이드>,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패러디하거나, 버드와 더그가 극 중간에 뮤지컬 제작 과정을 설명하며 “1막에서 잔뜩 힘을 주고, 2막에선 관객을 지루하게 한다”거나 “스토리와 무관한 역사적 배경을 끼워넣어 진지한 척한다”는 등 기존 작품들을 꼬집는 부분들이 브로드웨이에서 호평을 받은 원작의 힘을 잘 살려낸다.
여기에 사람들이 익숙해하는 한국 광고음악을 곁들이고 무대 뒤 커튼을 이용해 ‘그림자 효과’를 내는 김동연 연출가의 재치가 더해졌다. 김동연 연출가는 “꿈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뮤지컬 리딩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담아낸 기발한 작품”이라며 “한국 관객들이 이 낯선 형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2011년부터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이제야 무대에 올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125분을 달린 버드와 더그의 이야기는 종착점이 어딜까? 이들의 작품은 과연 투자자를 구할 수 있을까? 11월10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1544-1555.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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