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풍경 중에서>(1985년). 손상기의 모교인 여수상고(현재 남산초등학교) 뒤쪽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절개지와 마을 사이로 남산로가 새로 뚫렸다. 도판 샘터화랑 제공
손상기 25주기 회고전
39살 요절 화가 고향 여수서
고단한 삶 그린 127점 전시
작품 속 골목길과 바다풍경
전시관 가까운 곳에 그대로
39살 요절 화가 고향 여수서
고단한 삶 그린 127점 전시
작품 속 골목길과 바다풍경
전시관 가까운 곳에 그대로
여수시 교동시장에서 남산교를 건너면 남산북6길. 농산물공판장 뒷골목을 따라 20m쯤 들어가면 오른쪽에 갈색 나무대문 집이 보인다. 화가 손상기(1949~1988)가 중고등학교 6년을 머물며 화가의 꿈을 키운 곳이다. 그가 미술특기생으로 입학한 여수상업고등학교(현재 남산초등학교)가 직선거리로 200m. 쉬엄쉬엄 걸어도 10분이다. 미술가가 된 뒤 손상기는 이 집 주변 모습을 종종 작품에 담았다.
3살 무렵 척추만곡증을 앓아 5척 단신 꼽추가 된 손상기는 서른아홉 타계하기까지 암울한 시절, 고단한 민중의 삶을 화폭에 담아 ‘한국의 로트레크’로 불린다. 올해는 그가 작고한 지 25주기가 되는 해. 이를 기념해 손상기 회고전(1월26일까지)이 고향인 전남 여수에서 열리고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지에스칼텍스 예울마루에서다. 유화, 드로잉 등 모두 127점이 걸렸고, 아내 김분옥씨가 기억을 더듬어 작업실을 재현했다. <난지도-성하>, <공작도시-서울1>, <자라지 않는 나무>, <동>(冬), <귀가행렬>, <영원한 퇴원> 등 대표작이 포함됐다. 초·중등학교 시절 그가 머물던 집과 거리, 그가 바라봤던 언덕과 바다는 그 시절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후배 화가인 박치호씨는 손 화백이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살았던 한산사 아랫동네를 안내했다. 갯마을과 바다가 훤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는 군데군데 닭요릿집이 있을 뿐 그가 살던 집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가깝기는 하지만 언덕이 가팔라 학교 다니기가 힘들었을 법하다. 이어서 초등학교 졸업 뒤 옮겨간 교동시장 건너편 집과 그가 다닌 옛 여수상고. 손상기의 그림 소재가 된 남산, 돌산대교 부근 갯바위 등을 짚어주었다. 손 화백이 그린 고향 풍경이 실물로 살아난다. 손상기의 삶을 다큐로 만든 여수엠비시 오병종 피디는 그림 속의 높은 담벼락, 가파른 계단을 가리키며 “불편한 몸으로 산동네에서 산동네로 옮겨가며 살다간 손 화백의 눈에 비친 심리적인 높이”라고 설명했다.
“‘나 전시회 한다~ 잉’ 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거예요. 제가 눈치가 없어서 못 알아먹었기 때문이었어요. 전시회 비용이 없으니 좀 마련해달라는 얘기였지요.” 손상기기념사업회 김홍용 대표는 여수의 동창들이 추렴해 1983년 동덕미술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 비용 상당부분을 부담했다고 전했다.
서울에서 온 샘터화랑 엄중구 대표도 거들었다. “1984년 어느날 ㅌ그룹 ㅇ 대표가 왔어요. 1000만원을 들고 작품을 사겠다고요. 마침 초대 개인전 개막 준비를 위해 왔다갔다하는 손 화백의 눈빛을 보고 1000만원어치를 샀어요. 호당 3만원이었으니 좋은 작품으로 골라 갔지요. 처음으로 목돈을 쥐고 신기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손 화백은 1986년 서교동으로 화실을 옮겨 결혼도 하고 살 만해질 무렵 병원 출입이 잦아져 1988년 심부전증으로 타계했다. “장애물이 많은 도시/ 나에게 서울은 벅차다/ 육교, 지하도, 넓은 건널목 그리고 소음/ 한겨울에 에이는 추위/ 밀리는 사람들의 표정 없는 얼굴들 모두가….”(손상기의 작가 노트 중에서)
2010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에서 남자주인공이 좋아하는 작가로 등장하는데, 당시 보조작가로 활동한 손세린씨가 손 화백의 첫딸이다.
여수/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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