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딘 윌리퍼드의 ‘곰슨 박사의 휴대용 인터페이스’. 아트센터 이다 제공
예술의전당 ‘스팀펑크아트’전
‘증기시대가 지금도 계속됐다면?’
엉뚱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예술
2007년 첫선…아직은 낯선 장르
증기기관 거북선·날개 달린 배낭
아티스트들의 엉뚱한 ‘발명품’에
공상과학소설 속으로 빠져든듯
‘증기시대가 지금도 계속됐다면?’
엉뚱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예술
2007년 첫선…아직은 낯선 장르
증기기관 거북선·날개 달린 배낭
아티스트들의 엉뚱한 ‘발명품’에
공상과학소설 속으로 빠져든듯
청동판으로 마감한 단말기. 화면보다 타자기 글쇠처럼 생긴 키보드가 훨씬 크다. 믿거나 말거나 ‘곰슨 박사의 휴대용 인터페이스’는 황금열쇠를 꽂아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돌려야 켜진다. 팔목이 아닌 팔뚝에 차야 하고, 음성 대신 키보드를 꾹꾹 눌러 명령어를 입력해야 한다. 미국의 유명한 스팀펑크 아티스트인 토머스 D. 윌포드의 ‘발명품’이다.
그의 걸작은 ‘오르니솝터 날개를 단 배낭’. 오토바이 엔진에 가죽 날개를 연결한 것이 박쥐 날개를 닮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메모에서 따온 듯하다. 어깨에 착용하고 시동을 걸면 부르릉 하고 하늘을 난다는 설명이다. ‘그림로어 박사의 기계 팔’도 그의 발명인데, 청동 피스톤, 톱니바퀴, 볼트로 만들었다. 적의 대포에 한쪽 팔을 잃은 영웅을 위해 특별 제작한 장비다. 무슨 뚱딴지냐고? 맞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여는 ‘스팀펑크아트’ 전(5월19일까지)은 윌포드처럼 뚱딴지 같은 사람들이 만든 뚱딴지들로 가득하다. 뚱딴지들은 보는 이의 관점이나 너그러움의 정도에 따라 예술작품도 되고, 공예품이 된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작가 대우를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2007년께부터 출현한 ‘신종 장르’여서 아직 공인을 받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미지로 이어지는 경계선상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보이는 것만은 분명하다.
스팀펑크는 산업혁명을 부른 증기기관을 뜻하는 ‘스팀’과 현대사회에서 주류에 편승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를 지칭하는 ‘펑크’를 조합한 말이다. 시대착종적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장르의 아티스트들은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던 빅토리아 시대가 내연기관, 전기전자, 정보화 시대로 이행하지 않고 계속됐다면 지금 여기는 어떤 세상일까’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전시를 둘러보면 <해저 2만리>를 쓴 쥘 베른, <타임머신>의 작가 H. G. 웰스 등 19세기 소설가들이 복제돼 조각, 회화, 영화, 패션, 보석세공, 디지털 아트, 음악, 시계, 산업디자인, 사진, 건축 등 다양한 분야로 스며든 느낌이다.
이번에 초청된 작가들은 영국, 미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우크라이나 등 국적이 다양하다. 2009년 영국 옥스퍼드대 과학사박물관의 전시를 계기로 전세계로 빠르게 확산됐다는 설명을 뒷받침한다.
특이한 것은 ‘영국 빅토리아시대’라는 설정이 지역적·개인적으로 다양하게 변주한다는 점이다. 홍콩의 제임스 잉은 청 왕조와 증기기관을, 미국의 주드 터너는 중생대 삼엽충과 증기기관을, 일본의 나카무라 가즈히코는 구약시대와 근대 또는 동물과 기계를 뒤섞었다. 프랑스의 샘 반 올픈은 한국의 거북선과 증기기관을 착종시켰다. 시대 또는 생물 간의 뒤섞임은 당연하게 또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임진왜란이 미래의 증기기관 시대에 발발하니, 또다른 이순신이 나타나 하늘을 나는 거북선을 발명하게 된다는 식이다. 어쩌면 현대가 종말을 고하고 살아남은 인류가 만들어내는 시대상일지도 모른다.
이 분야 종사자들의 공통된 정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전화만 해도 수십년 새 한동네 한대에서 한집 한대로, 방안에서 거리 휴대용으로, 다이얼식에서, 버튼식을 거쳐 스크린터치식으로 바뀌었다. 전화를 지배하던 사람들은 이제 전화에 지배당해 공공장소-사적 공간, 직장-일터의 경계가 흐려지고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의 스팀펑크 아티스트 도노반은 스팀펑크 아트가 단기간에 전세계로 파급된 것을 두고 “청결하고 현대적이며 기술적으로 살균된 문화 속에 사는 우리의 불안을 스팀펑크가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국인으로는 디자인랩인디비주얼이 크기가 다른 손목시계의 톱니바퀴를 조합해 만든 마릴린 먼로상을, 박종덕씨는 상상 속의 연금술 기계, 수제 자전거를, 임동아는 쇠깃털을 단 인형 등을 냈다. 스팀펑크 스타일의 의상을 선보이는 디자이너 송혜명씨는 패션계의 떠오르는 작가이며, 602공작소 최윤녕씨는 스팀파이프를 이용한 테이블과 조명을 서울 강남의 카페 인테리어로 납품한 적이 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제임스 응. 아트센터 이다 제공
제이슨 브래머. 아트센터 이다 제공
아트 도너번. 아트센터 이다 제공
스팀펑크 아티스트인 톰 밴월.
우다가와 야스히토의 작품. 증기기관 시대가 끊기지 않고 현재까지 지속되었다는 가정 하에 작가들이 만든 허구적인 발명품들이다. 아트센터 이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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