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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걸레질인가, 예술인가

등록 2014-04-28 19:26

역동적인 붓질 흔적이 남은 추상작품. 도판 국제갤러리 제공
역동적인 붓질 흔적이 남은 추상작품. 도판 국제갤러리 제공
작가 김홍석 ‘블루 아워스’전

비정규 노동자 ‘걸레질 그림’ 통해
비난·호평 엇갈린 ‘모노크롬’ 재현
60~70년대 한국 추상미술 풍자
“수십년전 미술 마주하는 내 방식”
1960~70년대 한국 미술판을 누빈 것은 근엄한 추상화들이었다. 이제 화단 원로가 된 박서보, 서승원 등 당대 전위파 작가들은 일정한 방향의 선 또는 한두 색깔 물감덩이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평론가들과 함께 이 단순한 그림이 심오한 동양의 정신세계가 깃든 작품이라고 그들은 치켜세웠다. 오늘날도 비난과 호평이 엇갈리는 이른바 모노크롬(단색조) 회화라는 것이다. 화면에 빗금을 직직 그어 넣은 박서보 작가의 ‘묘법’ 연작이 대표적이다. 한국적 모더니즘의 전형이라는 찬사 못지않게 ‘하나의 선, 모양을 등록상표처럼 되풀이하면서 가식적 의미만 붙인 졸작’이라는 비판도 일었다.

국제 무대에서 각광받아온 작가 김홍석(50·상명대 교수)씨의 근작들은 60~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대명사인 추상그림들을 재기있게 물고 늘어진 작업으로 비친다. 이달 초부터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 차려진 근작 전시 ‘블루 아워스’는 ‘30~40년 전 어르신들 작품은 폼에 불과했다’는 냉소가 번뜩거린다.

내걸린 대표작은 역동적인 붓질 흔적이 남은 추상작품(사진)인데, 실은 걸레질 흔적에 가깝다. 작가가 먼저 물감칠한 뒤 비정규직 노동자들한테 종일 걸레질을 시킨 결과물이다. 일용직들을 불러 연필과 펜 등으로 빽빽하게 화폭에 계속 겹쳐 줄을 긋게한 작업을, 작가가 그린 일부 작품과 슬쩍 뒤섞은 드로잉 연작들도 비슷하다. 일용직 가사도우미, 아르바이트생들한테는 건축용 접착제 실리콘을 죽죽 짜서 바닥에 선그림처럼 펼쳐놓게 했다. 그랬더니 전시장은 얼핏 보기에도 70~80년대 어르신들의 단색조 회화를 오마주하는 분위기처럼 보인다. 거꾸로 말하면, 동양사상 등 깊은 형이상학적 사유 없이도 그럴싸한 모노크롬 작품들을 노동자들을 시켜 쉽게 뽑을 수 있다는 풍자가 된다. 은박 재질 포장으로 싸인 그림더미를 실물 같은 합성수지로 재현한 ‘기울고 과장된 형태에 대한 연구’란 설치물은 복제의 시대, 여전히 오리지널(원본)의 욕망에 휘둘리는 국내 미술계의 후진성을 꼬집고 있기도 하다. “70~80년대 미술과 단절되어 후배들은 기억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는 우리 미술판의 역사성 부재를 나름 풀고 싶었다”고 작가는 털어놓았다. 그 시절 거창한 명분이 붙은 선배들 그림을 이렇게 헐렁하게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는 “수십년 전 미술과 마주하는 나만의 방식”이라는 생각이었다.

‘블루 아워스’전은 이 시대 작가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이냐는 본질적 의문도 깔고 있다. 일용직들을 시켜 그린 추상·드로잉 그림, 그들에게 사포로 표면을 문지르게 한 폐캐비닛 설치물 등에서 작가는 소재를 정하고 작업 방향을 정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몸을 움직여 그리고 만들어낸 이는, 생산품이 작품인지도 모른 채 일당으로 생계를 꾸리는 비정규직들이었다. 물론 전시장에서 작품들은 작가의 창작물이 된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 가격대에 작품을 거래하는 이 대형 화랑에서 A4 용지 크기 드로잉이 500만원 이상, 추상 그림은 2천만원 이상, 설치작품은 1억원 이상의 값이 붙는다. 작품의 실생산자와 유통 과정이 겉도는 시장의 본색을 그대로 보여준다.

노골적으로 미술품 장삿속을 드러내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현대미술의 허상을 까발리는 작품을 내건 의미는 무엇일까. 비싼 값에 매매될 것이 분명한 출품작들의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정식 고용한 조수가 아닌 비정규직 일당 노동자를 투입 요소로 간주한 작가의 태도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벗어났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파격과 풍자 이면의 윤리적인 ‘헐거움’이 이 재기 넘치는 작가를 계속 따라다닐 아킬레스건이 될지 모른다. 11일까지. (02)735-8449.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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