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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속도전’ 현대인에게 ‘극단적 느림’의 미학을 묻다

등록 2014-05-22 19:10수정 2014-05-23 15:02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인 차이밍량이 지난 17일(현지시각) 오스트리아 빈 도심의 연극 <당나라의 승려> 공연장에서 자신의 작품과 연극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손준현 기자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인 차이밍량이 지난 17일(현지시각) 오스트리아 빈 도심의 연극 <당나라의 승려> 공연장에서 자신의 작품과 연극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손준현 기자
[문화‘랑’] 연극으로 돌아온 영화감독 차이밍량
내년 하반기 개관하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의 개관작 중 하나는 대만의 세계적 영화감독 차이밍량이 연출한 <당나라의 승려>다. 올해 먼저 오스트리아 빈 축제에서 선보인 이 작품과 감독을 만났다.


가로 4m 세로 8m의 백지. 붉은 옷의 승려는 드러누워 꼼짝도 않는다. 깊이 잠들었나,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그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현장(리캉성 분)이다. 주위에 검은 거미들이 모여들지만 그는 미동조차 않는다. 느리다. 그리고 낯설다. 자본주의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현대인을 들들 볶는다. 하지만 이 연극은 초 단위 시간을 길게 더 길게 늘인다. 그 한없이 늘인 낯선 시간 앞에서 유럽의 관객들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20년 전에 휴대폰을 들고 다닌다는 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세상이 엄청난 속도로 바뀌고 있다. 대부분 우리는 굉장히 빠른 것에 더 익숙해져 있고 느린 것에 낯설다. 빠른 우리에게 느림이 어떻게 다가오는가 주목했다.”

연극으로 출발해서 <애정만세>(1994)로 베네치아(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등을 거머쥔 대만 출신의 세계적 영화감독 차이밍량(57)이 다시 연극으로 돌아왔다. <애정만세>, <구멍>(1998) 등을 통해 ‘차이밍량의 페르소나’로 불리던 리캉성(이강생)과 함께.

영화 ‘애정만세’로 세계적 반열 올라
내년 광주 아시아예술극장 개관 때
리캉성과 함께한 ‘당나라의 승려’ 공연

꼼짝않고 누워있는 삼장법사 통해
관객 스스로 느림 체험토록 유도
빈축제 시연서 관객 반응 엇갈려
“한국선 내 연극 더 잘 이해할 것”

차이밍량은 내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 개관작 <당나라의 승려>(The Monk from the Tang Dynasty)를 오스트리아 빈 축제 무대에 미리 올렸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난 차이밍량은 대만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도 연극적이라는 평가다. 지난 17일(현지시각) 빈 시내 공연장에서 차이밍량을 만나 이번 작품과 연극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당나라의 승려>는 극단적 느림을 통해 관객들에게 속도구조에 포섭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 나오는 컨베이어시스템처럼 시간은 현대인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억압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실업과 빈곤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 자본주의의 시간은 공간도 집어삼킨다. 자본의 요구대로 옛 건물은 허물고 새로운 건물로 주기적으로 ‘재개발’된다. 차이밍량은 이런 시간의 폭력성에 주목한다.

그는 “1980~90년대 아시아 대부분 도시들이 엄청나게 발전·성장·팽창했다”며 자본의 시간이 공간을 위협한 점을 에둘러 표현했다. 또 “요즘 세상은 모든 것들이 우리를 쫓고 있다. 휴대폰은 실시간으로 모든 것을 연결함과 동시에 모든 것과 연결되지 않는다”며 자본의 속도구조 속에서 점점 소외되는 인간에 시선을 꽂아둔다.

차이밍량이 던지는 화두는 뭘까. 그는 관객들 스스로 질문할 때가 됐다고 했다. “느림에 대한 감각을 순간순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배우 리캉성이 천천히 걷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관객 스스로 느림을 체험해야 한다. 이는 시간의 관념을 실시간으로 대면하는 것을 뜻한다.”

연극 <당나라의 승려>에서 삼장법사 현장(리캉성 분)이 잠든 사이 세 명의 미술가가 목탄으로 거미를 그리고 있다.  아시아예술극장 제공
연극 <당나라의 승려>에서 삼장법사 현장(리캉성 분)이 잠든 사이 세 명의 미술가가 목탄으로 거미를 그리고 있다. 아시아예술극장 제공
다시 무대로 돌아가 보자. 붉은 옷의 승려는 한참 만에 일어나 한 모금의 물을 마시고 과일 한 개를 천천히 먹었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관객 몇 명이 다시 퇴장했다. 2시간을 넘겨서야 붉은 옷의 승려는 무대 저편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이윽고, 마침내, 드디어! 연극 <당나라의 승려>가 끝났다.

중도에 퇴장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 관객들 중에는 기립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에게는 이 연극이 시간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소중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미리 퇴장한 관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이나 인문학자들의 느림에 대한 예찬은 유럽인들도 익히 알고 있지만, 정작 공연장에서 만나는 ‘극단적인 느림’을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차이밍량은 관객의 퇴장을 마음에 크게 담아두지 않았다. “어제 초연에 300명 관객이 왔다. 공연에 앞서 배우에게 ‘이 무대는 전적으로 네 것이다. 관객에게 영향받지 말라. 관객들이 보다가 나가건 끝나고 나가건 시간의 문제다, 언제 나가든 상관없다’고 했다. 어제 20명이 나갔다. ‘어떻게 이렇게 느리지,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라며 떠났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다 이 연극을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유럽 공연예술의 대모’ 프리 라이젠 빈 축제 예술감독의 말에 귀 기울여 볼 만하다. “세계는 너무 크고 복잡해 단순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이미 죽은 예술’이 아닌 ‘살아 있는 새 예술’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점에서 프리 라이젠은 비서구권 작가 발굴과 전세계 공통인 예술의 동시대성을 강조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더이상 서구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를 반드시 다뤄야 한다. 그리고 (죽어 있는) 전통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동시대를 가져와야 한다.” 1951년에 시작된 빈 축제는 이제 유럽을 넘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세계를 아우르는 종합예술축제로 발돋움했다.

다시 차이밍량으로 돌아오면,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들에 대한 기대를 잊지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와 광주다큐멘터리축제에 다녀왔다. 지옥을 담당하는 한국의 사천왕을 좋아한다. 사천왕은 나의 수호신이다. 한국에서 내 연극을 좀더 잘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

<당나라의 승려>는 싱가포르 출신 호추니엔의 <만 마리의 호랑이들>(Ten Thousand Tigers)과 함께 2015년 하반기 문을 여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의 개관작으로 한국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두 작품 모두 아시아예술극장이 공동제작해 이번 빈 축제에서 먼저 선을 보였다.

공동제작에 나섰던 김성희 아시아예술극장 예술감독은 이 극장이 앞으로 나갈 방향을 내놨다. “세계적 아티스트, 극장들과 함께 제작해 아시아예술극장의 위상을 높이고, 공동제작으로 안정적 공연 유통망을 확보하며, 아시아 신인작가 발굴과 신작 제작 기회를 확대하겠다.” 아시아문화전당은 현재 90% 공정을 끝낸 상태로, 10월 완공이 되면 12월부터 시범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빈(오스트리아)/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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