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블랙박스>(김경주 작 유영봉 연출)
시인 김경주가 쓴 ‘블랙박스’
현대인 불안 빗댄 부조리극
현대인 불안 빗댄 부조리극
추락한 비행기의 진실은 블랙박스에 온전히 기록돼 있을까? 어쩌면 최후순간의 말들은 외계의 언어처럼 해독불가 상태로 뒤엉켜 있을지 모른다. 긴박한 순간의 소리는 수많은 소음을 걸러내야만 또렷한 몇 마디 진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소음에 가득 찬 우리 삶도 뒤엉킨 진실처럼 불안하다.
연극 <블랙박스>(사진·김경주 작 유영봉 연출)는 이륙 뒤 밤 11시부터 자정까지 구름 속에 머무는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 ‘기내극’이다.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할 것으로 기대되는 60대 언어학자와 감정대로 몸을 맡길 것 같은 30대 선박 기관사가 옆 좌석에 앉았다. 뒤엉킨 현실과 말의 세계를 매우 엉뚱한 언어학자를 통해 환기시키고, 강박증에 시달리는 선원을 통해 불안한 현대인의 삶을 부각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어처럼 반짝이고 때로는 장난스럽다. “오늘은 백 년 전에 떠난 구름이 제자리로 돌아와서 우는 날이에요”라고 하거나 “삶은, 난기류, 위를, 지나가는, 밑줄 같은 거야”라는 대사가 그렇다. 사회적 발언으로 읽히는 대목도 있다. 첫 직장에 입사한 스튜어디스는 아직 갚아야 할 학자금 이자가 많다. 그는 성희롱에 시달리는 감정노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세계가 모호하듯 연극도 모호하다.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익숙한 관객에겐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다. 작품을 쓴 시인 겸 극작가 김경주는 “많은 도시를 여행하던 중 승객이 별로 없는 비행기에서 난기류를 만났을 때 불안감에 휩싸인 적이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지 말고 그런 상태에 주목하기 바란다.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우리 인생의 굴곡과 현대인의 불안을 얘기하고 싶었다” 고 했다.
추락하는 비행기라는 소재에서 침몰한 세월호가 떠오른다. 김경주는 실제로 “연습 중에 사고가 났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예술은 사건을 대상화한다기보다 진실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사고와 직접 연결하는 해석은 경계했다.
낭독극으로 공연된 적이 있는 이 작품이 본격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것은 처음이다. 유영봉 연출은 2010년 극단 서울괴담을 창단하고 무대 외 다양한 공간에서 실험적 공연을 펼쳐왔다. 오는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스튜디오76’에서 공연한다. (02)3676-3676.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한강아트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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