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 작가가 16일 낮(현지시각) ‘베르사유 초대전’ 공식 개막행사에서 베르사유궁 본관 앞에 세운 무지개 아치 아래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우환 베르사유 궁 초대전
대정원에 세운 10m 높이 아치문
돌과 철판의 대화 ‘관계항’ 등 설치
“정원 설계 300년 전 르노트르
존중하며 넘어서는 작업 다짐”
19일 바젤서도 이우환 전시
대정원에 세운 10m 높이 아치문
돌과 철판의 대화 ‘관계항’ 등 설치
“정원 설계 300년 전 르노트르
존중하며 넘어서는 작업 다짐”
19일 바젤서도 이우환 전시
화두풀이를 재촉받는 선승 같았다. 세계미술계가 주목하는 프랑스 베르사유궁 국가전에 초대된 막후 내력, 작품의 숨은 뜻을 집어서 말해달라는 물음이 그이 앞에 빗발친다. 청색자켓 입은 78살의 노작가가 한마디 툭 던졌다. “작가는 입 다무는게 좋아요. 문호 괴테도 그랬어요. 예술작품은 얘기가 덧붙을수록 흐려진다고. 그냥 느껴보세요.”
2008년 제프 쿤스를 시작으로 매해 세계적 작가를 초대해 여는 이 전시회에 아시아 작가로선 두번째로 초청된 거장. 이우환 작가는 누구보다 잰 걸음으로 황금왕관 장식 빛나는 베르사유궁 본관 후문을 빠져나갔다. 나가면, 곧장 대정원에 내려가는 전망로와 하늘이 비치는 분수정원이다. 그러나 뒤따르는 지인들 눈아귀에 먼저 들어온 건 거대한 스테인리스 아치였다. 10m 넘는 높이에 양 옆에 유럽산 돌덩이를 두른 아치 문이 섰다. 수십년전 일본 나가노 촌 하늘에 비친 무지개를 떠올려 만들었다는 작품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문은 묘한 분위기를 빚는다”는 그의 말대로 아치는 마법액자였다. 뭉게구름과 비행운이 떠있는 망망대해 같은 하늘, 그 아래 10㎞ 이상 직선, 좌우 대칭으로 펼쳐진 바로크 정원의 도열한 숲과 운하가 아치 틀 속으로 빨려들어왔다. 쨍쨍한 햇살 아래 금속아치와 그 아래 땅바닥에 펼쳐진 금속판이 서로 빛을 퉁기며 관객을 감싼다. 이씨가 ‘무대’로 명명한 바닥 철판 위에 선 관객은 아롱지는 빛살 속에 아치 안에 들어온 베르사유 정원의 장대한 땅과 하늘 풍광을 누리는 주인공이 된다. 제목도 신경 쓸 것 없고 작품에서 각자 색다른 상상을 할 수 있으면 된다고 작가가 일러준다. 돌과 철판을 나란히 놓은 아치 옆의 설치작업 ‘대화 X’에는 여행온 독일가족 아이들이 올라타며 놀기도 했다. 재불사진가 염중호씨는 “전통누각에서 끌어들여 보는 대자연 풍경을 철저히 계산된 베르사유 공간에서 재현해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베르사유의 숨막히는 인공미가 이토록 편안한 풍경으로 풀려져 나온다는게 신기하다”고 했다.
16일 낮(현지시각) 펼쳐진 이우환 작가의 베르사유 초대전 공식 개막행사는 그가 빚어낸 베르사유의 편안한 변신을 즐기는 산책길이었다. 40년 지기인 현지 평론가 미셀 누리자니를 비롯해 일본 기획자 시미즈 도시오, 조각가 심문섭씨, 지난해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였던 김승덕씨, 국내 화랑계 인사 등이 동행했다. 그들은 언덕의 아치와 ‘거인의 막대기’ 등을 돌아본 뒤 저 아래 운하로 가는 언덕길을 작가를 따라 내려갔다. 길 옆 풀밭에 표면을 곡면처리한 철판 40개가 눕거나 나란히 서서 물결친다. 철판엔 야생동물의 발자국들이 가득 찍혔고, 곡면엔 반사된 빛이 선을 이뤄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환영이 나타났다. ‘바람의 판’이란 제목이 붙은 이 철판들의 대열이 끝날 무렵 운하 부근에 도착한 관객들은 옆쪽 플라타너스 터널을 보더니 ‘정말 명당’이라며 탄성을 터뜨린다. 녹음 속에 돌과 철판이 대화하는 작가의 ‘관계항’ 연작이 놓여 있었다. 17~18세기 유럽 최대의 판도를 구축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당대 최고의 정원예술가 앙드레 르노트르에게 명령한다. 언덕 위 궁전 발코니에서 온 누리를 굽어볼 수 있는 좌우대칭 정원의 소우주를 만들라고. 지난 12일 회견에서도 밝혔듯, 작가는 지난해 여름부터 수십여차례 정원을 오가면서, 줄곧 르노트르의 300여년전 사명을 의식했다고 털어놓는다. “단 1㎝도 극도로 계산한 공간을 연출했기에, 나는 그 공간을 존중하면서도 전혀 다른 식으로 넘어서는 작업을 하자고 다짐했지요.”
거의 개방하지 않았던 언덕 중간 비밀의 화원에서 만난 ‘별들의 그림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흰 자갈 위 7개의 돌덩이와 그 돌덩이가 남기는 그림자 설치물로 이런 그의 생각을 집약해 보여주었다. 일본 선종사찰의 돌밭 정원 같은 이 명상적 설치물은 다니엘 뷔렝 등 서구의 동료작가들에게 가장 절찬을 받고 있다고 한다. 누리자니는 “무한과 관계, 자연·우주의 본질을 추구해온 작가의 일관성을 낯선 베르사유 공간에서도 지속시키면서도 새 울림을 불어넣었다”고 호평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제왕의 권위를 원근의 시각으로 실증시켜주는 권력미의 공간에 작가는 고민 끝에 자연의 숨결을 불어넣는 틈새의 미학으로 화답한 셈이었다. 싱그러운 녹음 아래 이어진 이우환의 산책은 아폴론 신의 연못 앞 땅에 구덩이를 파놓고 돌을 놓은 ‘무덤-르노트르를 위한 오마주’로 끝났다.
그의 작품들은 곧 해체돼 사라진다. 하지만, 그를 후원한 페이스갤러리와 국제갤러리 등 국내외 화랑들은 19일 개막하는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에서도 작가의 특별전시 공간을 차릴 계획이어서 유럽의 이우환 열기는 당분간 이어질 듯하다.
베르사유/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베르사유 언덕에서 호수운하로 내려가는 사면에 위치한 바람의 흐름을 형상화한 이우환씨의 설치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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