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열린 ‘최치원 풍류탄생’전 설명회에서 참석자들이 서용선 작가의 설치작품 <출세>를 감상하고 있다. 평생 경계인으로 살았던 지식인 최치원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미술인 30여명 신라 대학자 테마로
입산·출세, 세월호·목민관 등 그려
예술의전당 서예관 30일부터 전시
입산·출세, 세월호·목민관 등 그려
예술의전당 서예관 30일부터 전시
17세기 바로크시대의 권력자였던 교황 이노센트 10세는 두 폭의 명화로 기억된다. 그 첫째는 당대 거장 벨라스케스가 그린 벨벳 가운 차림의 엄숙한 고전적 인물상이다. 둘째는 20세기 이 고전 그림을 해체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다. 베이컨은 현대인의 불안감을 버무려 교황을 공포에 질려 절규하는 남자로 바꿔버렸다. 11세기 북송대의 문장가 소동파도 후대 중국·조선 화가들에 의해 단골 그림 소재가 됐는데, 작가의 시대상과 개인 속내를 투영해 달리 모사됐다. 문예사 거장들이나 권력자의 이미지들은 화가들에게 상상력을 갈고닦는 실습 대상이 되곤 했던 것이다.
이번엔 고운 최치원(857~?)이다. 1000여년 전 당과 신라 문예계를 누볐던 글로벌 지식인이나 말년 행적은 전설에 파묻힌 이 대학자를 2014년 7월 국내 쟁쟁한 현대예술가들이 작업감으로 점찍었다. 서울 예술의전당 안 서예박물관에서 30일부터 9월14일까지 선보이는 ‘최치원-풍류風流탄생’전은 역사적 위인과 현대미술이 만나는 기획전 첫 회다. 이동국 서예부장과 윤범모, 박영택씨 등 관련 전문가들이 틀을 짜고, 30명 넘는 국내 미술인들이 최치원을 테마로 작업한 융복합 전시를 표방했다.
2층 들머리에서 인물역사화가인 서용선씨의 3m 넘는 대형 설치작업을 만난다. 여러개의 거친 나무쪽을 이어붙여 장승처럼 만든 봉두난발의 남자와 관모를 쓴 관리의 상이다. 거칠고 단순한 윤곽선, 눈에서 광기를 번뜩이는 몰골의 최치원. 제목이 ‘출세’와 ‘입산’이니 그의 삶을 갈라놓은 두가지 행로다. 중국에서는 외국인, 신라에선 육두품이라는 속박에 얽매여 나래를 펼 수 없었던 천재 지식인의 내면이 울려온다. 화가 황재형씨는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 최치원을 세월호 참사 현장으로 불러냈다.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하며 스스로 고뇌하는 이미지를 상상해 그려냈다. 김종원 작가는 최치원의 시 ‘제가야산독서당시’를 붉게 물들인 한지에 청색 안료를 써서 추상적 난필의 이미지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내놓았다. 매주 토요일 3층에서 펼칠 무용가 홍승엽씨의 최치원의 기운을 기리는 오마주 춤판 ‘소나무 흔들어 하늘을 닦는다’도 관심거리다. 유물 중에는 고운이 새긴 사산비명 탁본과 국내 인물조각상의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해인사 희랑대사상(복제본)이 눈에 띈다. 전당 쪽은 작가들은 최치원이 유불선 삼도를 바탕으로 주창했다는 풍류도를 실체화하는 데 대체로 초점을 맞췄다고 소개했다. 이동국 부장은 “예술가들이 최치원 연구자들과 밤새워 토론할 만큼 열정이 대단했다”고 전했다.
열정에 비해, 융복합 취지를 뒷받침할 기획력과 전시 세부 면에선 아쉬움이 남는다. 입구 계단부터 키치·팝아트 계열 작가인 최정화씨의 서양식 가짜 기둥과 식탁보를 중첩시킨 작업이 들어간 건 어떤 맥락인지 설득력이 부족하다.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은 왜 나와 있을까? 서예박물관의 기획전은 의욕과 달리, 빈약한 전시 디테일, 작품별 수준차, 진위 논란 등으로 실망을 안겨준 적이 적잖았다. 이 전시도 그런 전례에서 그닥 자유롭지는 못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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