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전 ‘영원한 현역 극작가’ 이강백씨(왼쪽)와 중견 극작가 장우재씨가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우리 시대 극작가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대화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강백·장우재의 글쓰기란
“원고 쓴 뒤 고치고 또 고치고
머리가 아니라 근육으로 써
한해 300여편 무대 오르는 연극
우리가 어떤 시대 살고있나 보여줘”
“원고 쓴 뒤 고치고 또 고치고
머리가 아니라 근육으로 써
한해 300여편 무대 오르는 연극
우리가 어떤 시대 살고있나 보여줘”
‘영원한 동시대 작가’ 이강백(67)은 손 글씨로 원고를 쓴다. A4 용지에 ‘하나를 둘러싼 여섯’이라고 쓴 제목은 검은 플러스펜으로 지웠다. 그 밑에 ‘즐거운 복희’라고 새 제목을 달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쓴 원고의 7할은 지우고 새로 썼다. 옆으로 화살표를 쳐 고치고, 위로 화살표를 쳐 빨간 펜으로 고쳤다. 고치고 또 고친 ‘시시포스적 노역’은 깨알 같은 ‘사유의 흔적’으로 육필 원고에 차곡차곡 지층처럼 쌓였다. “나는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근육으로 씁니다.”
이강백은 1971년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공교롭게 그해 태어난 극작가 겸 연출가 장우재(43)는 “저는 컴퓨터에 원고를 쓰는데, 빈 화면을 보면 이 광활한 공백을 어떻게 채울지 아득해집니다”라고 했다. 한국 극작계의 거목인 이강백과 왕성하게 활동중인 중견 극작가 장우재가 만나 ‘우리 시대 극작가란 무엇인가’를 놓고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세대를 뛰어넘어 “극작가는 시대와 소통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오는 5~8일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리는 ‘남산희곡페스티벌’에 참여한다. 지난달 31일 서울 대학로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이강백 극작의 핵심은 ‘시대와 교감’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좋은 작품을 꼽으라면, <알리바이 연대기>(김재엽 작·연출)와 <환도열차>(장우재 작·연출)를 들 수 있어요.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되돌아보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성찰하는 거죠. 환도열차는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해서 우리가 만들려고 했던 삶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보여줍니다. 한 해 300편이 넘는 작품이 올라가지만, 결국 연극은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강백의 칭찬에 <환도열차>를 쓴 장우재는 쑥스러운 듯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이어 이강백은 “이를테면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는 엄청난 드라마를 보게 됩니다. 곧 어떤 시대가 이런 세월호를 만들어냈느냐는 작가정신이 여기서 생기는 것이죠”라고 강조했다.
장우재가 쓰고 연출한 <환도열차>는 1953년 부산발 열차가 2014년 갑자기 서울에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강백이 꼽은 작품은 모두 과거를 불러내되,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 캐묻는다. 이강백이 생각하는 동시대성이 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장우재가 이어받았다. “우리가 가진 하드웨어와 시스템은 현대적이지만, 사유의 패턴은 아직 근대적이어서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들을 작품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해요.” 그는 “극작가 중에서 선생님이라고 하면 두 분을 꼽는데요. 공연이라는 측면에서 글쓰기는 오태석 선생님한테 배울 수 있고 텍스트적인 글쓰기는 이강백 선생님한테 배울 수 있어요. 특히 이 선생님 작품은 여러 번 읽을수록 더 맛이 납니다”라고 했다.
이강백은 극작가를 ‘근육노동자’라고 불렀다. “오태석 선생은 극작가를 가르칠 때 우선 다른 사람 작품을 원고지에 또박또박 옮기는 필기부터 시켰어요. 그래요, 작품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근육으로 쓰는 거예요. 고치고 또 고치는 정교한 글쓰기죠. 1960년대 말~70년대 초 오태석 등 수많은 극작가가 나타났어요. 그때 태어난 극작가들은 모두 근육노동자였지요.” 장우재는 ‘근육노동’의 비밀을 하나 공개했다. “이 선생님이 쓴 육필 원고를 제자들이 컴퓨터로 옮겨줍니다. 누구라고 하면 다 아는 유명 극작가·연출가들이 이 선생님의 원고를 옮겨줬어요. 인과관계가 꼭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작업을 했던 이들이 크게 성장했어요.”
극작계의 거목 이강백, 튼튼한 허리 장우재에 이어 이제 발을 내딛는 신진 극작가들의 마음가짐은 어떨까? ‘남산희곡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박신수진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늘 두렵지만, 묘한 기대와 즐거움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고 했다. 창작의 원천인 ‘불안’과 ‘열정’을 동시에 드러내는 포부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이강백씨의 육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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