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미술관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인 18~19세기께의 철화백자 항아리. 자유분방하고 질박한 배무늬가 그려진 명품으로 정조문 선생이 가장 아끼던 작품이다. 고려미술관 제공
정조문 컬렉션의 가치는
정조문 선생은 1955년 교토의 산조거리를 산책하다 ‘야나기’란 고미술점에서 우연히 본 조선백자 항아리에 매혹돼 우리 문화재에 눈뜨게 됐다고 알려져 있다. <정조문과 고려미술관>(다연 펴냄)에 실린 장남 정희두씨의 회고를 보면, 고인은 일본 국민에서 외국인으로 격하돼 갖은 차별을 당했던 당시 동포들 현실에 반발했지만, 저항하는 건 감정적 소모라고 생각했다. 일본 역사에서 왜 조선의 문화예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 의미를 깨닫고 확산시키는 것이 재일한국인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필요하다는 신념이었다.
이런 일념으로 40여년간 이어진 그의 수집 활동은 명품만 찾는 여느 컬렉터들과는 달랐다. 관모장식 같은 선사·삼국시대 고고유물부터 청자와 백자, 불상과 불화, 민화와 화각장식 등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장르별로 다기한 갈래를 뻗어나갔다. 절친했던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는 “그가 모은 미술품 한점 한점에는 그의 땀과 눈물과 피가 어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1700여점에 달하는 정조문 컬렉션은 한점 유물 구입을 놓고 며칠 밤을 새우고 번민하며, 막대한 사업자금을 변통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뤄졌다. 부인 오련순과 69~81년 잡지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같이 내며 일본 속 우리 문화유산들을 답사하고 토론했던 일본 문화계 지식인들이 조언자 역할을 해주었다.
1988년 10월 자택에 개관한 고려미술관은 일본 내 유일한 한국문화재전문 미술관이다. 개관 이래 매년 2~3차례의 기획전을 통해 선보여온 정조문 컬렉션은 도자기로 이름 높다. 청자상감운학문고족배 같은 고려청자와 17세기 후반의 백자 항아리와 청화백자, 생전 가장 아꼈던 배무늬 철화백자 항아리들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569년작 불화인 ‘치성광여래강림도’와 ‘작호도’ 등의 민화류가, 불교조각으로는 목조아미타삼존불감 등이 알려져 있다. 소뿔로 만든 화각공예품과 조선 목가구 등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고고학 기반을 닦은 일본학자 아리미쓰 교이치가 기증한 연구자료들은 국내 고고학자들에게 필수자료로 꼽힌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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