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 음악인생 40년’ 강헌이 묻고 한대수가 답하다
1974년 미국에서 온 이상한 청년 한대수가 긴 머리 휘날리며 “물 좀 주소”라고 부르짖었던 것은 한국 대중음악의 잠을 깨운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40년 동안 당시 활동했던 많은 가수들이 마이크를 끄거나 잊혔지만 한대수(67)는 쉼없이 음반을 내며 공연해왔다. 한대수 데뷔 40돌 기념 음반이 나온다. 소셜 펀딩으로 만들어진 이 음반에서 13개의 한대수 곡 가운데 10곡을 전인권, 강산에, 윤도현, 이상은, 호란 등이, 2곡은 한대수가, 마지막 1곡은 시민과 가수가 함께 불렀다. 오는 25일과 26일에는 서울 엘지아트센터에서 ‘한대수 콘서트(Reverse/Rebirth)’도 열린다. 지난주에는 인생을 돌아보는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북하우스 펴냄)이라는 책도 냈다. 시대에 부딪치며 ‘자유의 길’을 노래해온 가수 한대수와 음악평론가 강헌이 만나 한대수 음악인생 40년을 함께 돌아봤다.
강헌(이하 강) 이번에 아주 귀한 음반을 내셨던데 지금까지 내신 음반과 사뭇 다르다. 또 음반사의 돈이 아니라 한대수의 시민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음악가, 엔지니어, 프로듀서까지 공들인 콜라보레이션 음반이라는 점이 뜻깊다.
한대수(이하 한) 지난해 <멀고 먼-길>(1집) 낸 지 40년 됐다고 주변에서 뭘 좀 내보라고 하길래 큰 음반사 가서 제작비 좀 주소 했는데 안 주더라고. 그래서 말자, 했는데 시비에스(CBS) 방송에서 ‘한대수 40주년 프로젝트’라고 해서 소셜 펀딩을 한다는 거야. 그게 성공했다. 게다가 전인권, 강산에, 윤도현, 호란 여러분들이 두 번 생각 안 하고 합시다 해서 양호하게 됐어.
나간 판 전부 압수돼 폐기된 건
유신시대라고 해도 유일했지
당시 아내가 ‘음악하려면 미국 가라’ 해 대중들은 음악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려. 음악가가 죽어야 음악의 가치가 올라간다. 내가 마누라 옥사나보고 내 악보나 쪽지 하나 버리지 말라고 했다. 딸이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전엔 ‘자유’ ‘자유’ 하면서 아무것도 필요없었거든. 음악가 한대수가 어디 가서 술 한잔 못 얻어먹겠나. 그런데 마누라는 나보다 22살 어리고 딸 양호는 9살인데 내가 화폐를 벌어놓은 것도 없고 하니까 나 죽으면 내 기타, 악보 다 경매해라 그랬거든. 그런데 이번에 음반 만들면서 옥사나한테 ‘잘하면 나 죽기 전에 이거 다 팔리겠다’ 그랬다. 으하하하(웃음). 강 전인권밴드가 부른 5번째 곡 ‘자유의 길’을 듣다가 충격을 받았다. 명트랙이다. 선생님 앨범에 실린 것은 ‘나그네 길’이었는데 처음부터 전인권씨가 이걸 하겠다고 했나. 한 처음부터 자기는 그걸 하겠다고 했고 아주 위대하게 됐어. 전인권이 완전히 자기화했어. 자기의 고독, 전인권이 갈망하는 자유. 딱 듣는데 이건 내 노래가 아니라 전인권 노래야. 너무 뼈저리게 느꼈어. 마지막에 울부짖을 땐 목소리에 쇳소리가 들려. 그런데 그것도 아름다워. 강 말하자면 그 노래 때문에 한대수가 이 땅을 떠났던 것 아닌가. 아직도 궁금한 게 1979년 처음 심의에 걸려서 노래 ‘자유의 길’을 ‘나그네 길’로 바꾸면서 “쓰라린 자유의 길에 나는 지쳤다”는 가사도 1, 3절은 ‘나그네 길’로 고쳤는데 2절에선 슬쩍 ‘자유의 길’이라고 하더라. 일부러 그러신 것 아닌가. 한 하하, 안 바꿨어. 나그네 길하고 자유의 길은 다르잖아. 심의를 받았지만 판이 나오고 보니까 마지막절 가사가 안 바뀌었어. 너무 고마운 거야. 그런데 다 회수해서 폐기됐지. 유신시대라고 하더라도 이미 나간 판을 다시 압수해서 폐기처분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내 생각엔 ‘자유의 길’도 그렇지만 ‘여치의 죽음’은 연주곡인데 기타 소리가 뭔가 정권을 비꼬는 것 같아서 문제였고, ‘희망가’가 또 결정적이었어.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는 왜 묻냔 말이지. 곧 이어 대마초 사건도 나면서 신중현 등이 줄줄이 잡혀갔어. 비틀스부터 레드 제플린까지 록가수들이 모두 10대 말에서 20대까지 가장 많이 작곡하잖아. 나도 곡이 막 나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첫번째 부인 명신이 ‘당신 이 나라에서 음악 할 가망이 없다. 음악 하고 싶으면 미국 가라’ 그러더라고. 강 고등학교 1학년 때 한대수의 노래를 어느 리어카에서 불법테이프로 만났다. 60년대 말부터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중심으로 한대수와 김민기의 시대를 이야기하지만 김민기는 단아한 모범생 같은데 한대수는 발음도 이상하고 정체불명 양아치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음악이 존재하고 라디오엔 왜 안 나오지?’ 이것이 제가 살고 있는 시대와 땅에 대한 첫번째 문제의식이었다. 그 답은 대학 가서 알게 됐지만 80년대 대학에도 한대수는 없었다. 반미 정서가 강해서 캠퍼스에서 록 공연이 열리면 선배들이 가서 오물을 끼얹는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인디 록밴드들이 한대수를 음악적 아버지라고 여기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김민기 계승자는 김광석, 안치환에서 끝나고 말았는데, 정작 80년대 삭제됐던 가수 한대수는 90년대 음악적 출발점이 된 것이다. 혼자 풀 뜯지 않으면 작곡 할수없어
작곡가는 끊임없이 실험을 해야 해
지금은 실험생각조차 제거된 시대 한 사실 뉴욕 가서 완전히 음악과 단절했어. 하루 10시간씩 일해 기타 사고 연습실 빌려 5달러 받는 생활을 2년 이상 못 버티겠더라고. 동시에 한국에 있는 모든 커넥션, 관계도 끊었지. 그런데 1997년 일본 후쿠오카 공연부터 한국에서 매년 공연하다 음악도 계속할 기회를 얻었어. 90년대 인디신, 좋았지. 어어부밴드, 크래쉬, 블랙 신드롬, 황신혜밴드… 좋았는데 훌렁 타버렸지. 나 너무 슬퍼. 그래 가지고 아이돌 그룹이 잡았지. 너는 에스엠(SM)이냐 나는 와이지(YG)다 하는 지금 음악은 완전히 독재야. 강 이 땅에서 한대수는 14년을 사라졌다가 1989년 3집 <무한대>낼 때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갈수록 점점 아방가르드해져 당황했다. 한대수 귀국 직전 김민기 선배와 학전에 앉아 소주를 마시다가 한대수는 무세중 같은 전위예술가가 되려나 보다 했더니 ‘네가 한대수에 대해 뭘 안다고’ 하면서 몹시 역정을 내시더라. 한 하하, 나 미국에서 무세중씨 만났어. 4집, 5집에서 좀 전위예술가로 갔어. 정확한 말씀이야. 그런데 작곡가는 실험을 해야 해. 계속 ‘행복의 나라’만 할 수는 없는 거야. 성공한 케이스가 없지만 실험할 필요가 있어. 그런데 대부분 강헌씨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 야, 너무 가버렸어. 지금은 그런 실험을 할 생각조차 제거된 시대야. 소셜펀딩 통해 데뷔 40돌 기념음반
전인권 등이 그의 곡 10곡 리메이크
25~26일 LG아트센터에서 콘서트도
강 한대수 존재 자체가 지금도 생소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자유의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한대수 노래는 ‘내가 너희들과 다를 수 있다는 자유’를 주장했고 지금 생물학적으로 은퇴할 연령이 되어서도 현역 한대수로 활동하면서 ‘내가 세상을 폐기시킬지언정 세상이 나를 폐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태도에 매혹되는 것 같다.
한 내 생각에 동의 안 해도 되는데 날 안아주질 않아. 굉장히 외로웠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실종됐고 어머니는 재혼했잖아.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갔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 히피들의 소굴, 이스트 빌리지에 살고 있는 꼴을 보고 어머니가 나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였어. 그 당시에 미국 가서 공부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어. 애들이 굉장히 악하잖아. 잔인하게 당하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또 당했지. 외로운데 어떤 그룹에도 들어가려고 생각을 안 했어. 나 자신이 하나의 세계라고 생각했거든. 니체가 그랬어. 양이 혼자 풀을 뜯어먹으면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난 양떼에 섞이긴 싫거든. 우하하하(웃음), 난 주류일 수가 없어. 잘났다는 게 아니고, 혼자 풀 뜯지 않으면 작곡이 될 수가 없어.
강 ‘영원한 현역가수’ 한대수가 헌정 앨범을 받아들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건가.
한 음악적 작업은 ‘노’ 해본 적이 없는데 음반 시장이 상당히 문제다. 나 같은 할배 가수들도 음반사에서 앨범을 내 줄 수 있어야 작업을 하는데 그게 불투명하다. 미국은 옛날 블루스 록이나 재즈가 지금도 꾸준히 조금씩 잘 팔려. 음반도 소소하게 찾아 듣고 족보를 가진 음악 소비를 하는데 우린 그게 잘 안된다. 시스터(걸그룹) 같은 분들은 항상 있겠지만 한대수 할아버지는 항상 안 있지.
정리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북하우스 제공
[한대수 40주년 헌정앨범 ‘하루 아침’ 뮤직비디오-제작 선샤인 언더그라운드]
가수 한대수(왼쪽)는 한때 한국 음악사에서 사라졌지만 세대를 건너뛰어 인디 가수들의 음악적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골목길에서 한씨가 “액션!” 하고 외치며 음악평론가 강헌에게 포즈를 권하자 동시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유신시대라고 해도 유일했지
당시 아내가 ‘음악하려면 미국 가라’ 해 대중들은 음악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려. 음악가가 죽어야 음악의 가치가 올라간다. 내가 마누라 옥사나보고 내 악보나 쪽지 하나 버리지 말라고 했다. 딸이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전엔 ‘자유’ ‘자유’ 하면서 아무것도 필요없었거든. 음악가 한대수가 어디 가서 술 한잔 못 얻어먹겠나. 그런데 마누라는 나보다 22살 어리고 딸 양호는 9살인데 내가 화폐를 벌어놓은 것도 없고 하니까 나 죽으면 내 기타, 악보 다 경매해라 그랬거든. 그런데 이번에 음반 만들면서 옥사나한테 ‘잘하면 나 죽기 전에 이거 다 팔리겠다’ 그랬다. 으하하하(웃음). 강 전인권밴드가 부른 5번째 곡 ‘자유의 길’을 듣다가 충격을 받았다. 명트랙이다. 선생님 앨범에 실린 것은 ‘나그네 길’이었는데 처음부터 전인권씨가 이걸 하겠다고 했나. 한 처음부터 자기는 그걸 하겠다고 했고 아주 위대하게 됐어. 전인권이 완전히 자기화했어. 자기의 고독, 전인권이 갈망하는 자유. 딱 듣는데 이건 내 노래가 아니라 전인권 노래야. 너무 뼈저리게 느꼈어. 마지막에 울부짖을 땐 목소리에 쇳소리가 들려. 그런데 그것도 아름다워. 강 말하자면 그 노래 때문에 한대수가 이 땅을 떠났던 것 아닌가. 아직도 궁금한 게 1979년 처음 심의에 걸려서 노래 ‘자유의 길’을 ‘나그네 길’로 바꾸면서 “쓰라린 자유의 길에 나는 지쳤다”는 가사도 1, 3절은 ‘나그네 길’로 고쳤는데 2절에선 슬쩍 ‘자유의 길’이라고 하더라. 일부러 그러신 것 아닌가. 한 하하, 안 바꿨어. 나그네 길하고 자유의 길은 다르잖아. 심의를 받았지만 판이 나오고 보니까 마지막절 가사가 안 바뀌었어. 너무 고마운 거야. 그런데 다 회수해서 폐기됐지. 유신시대라고 하더라도 이미 나간 판을 다시 압수해서 폐기처분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내 생각엔 ‘자유의 길’도 그렇지만 ‘여치의 죽음’은 연주곡인데 기타 소리가 뭔가 정권을 비꼬는 것 같아서 문제였고, ‘희망가’가 또 결정적이었어.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는 왜 묻냔 말이지. 곧 이어 대마초 사건도 나면서 신중현 등이 줄줄이 잡혀갔어. 비틀스부터 레드 제플린까지 록가수들이 모두 10대 말에서 20대까지 가장 많이 작곡하잖아. 나도 곡이 막 나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첫번째 부인 명신이 ‘당신 이 나라에서 음악 할 가망이 없다. 음악 하고 싶으면 미국 가라’ 그러더라고. 강 고등학교 1학년 때 한대수의 노래를 어느 리어카에서 불법테이프로 만났다. 60년대 말부터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중심으로 한대수와 김민기의 시대를 이야기하지만 김민기는 단아한 모범생 같은데 한대수는 발음도 이상하고 정체불명 양아치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음악이 존재하고 라디오엔 왜 안 나오지?’ 이것이 제가 살고 있는 시대와 땅에 대한 첫번째 문제의식이었다. 그 답은 대학 가서 알게 됐지만 80년대 대학에도 한대수는 없었다. 반미 정서가 강해서 캠퍼스에서 록 공연이 열리면 선배들이 가서 오물을 끼얹는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인디 록밴드들이 한대수를 음악적 아버지라고 여기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김민기 계승자는 김광석, 안치환에서 끝나고 말았는데, 정작 80년대 삭제됐던 가수 한대수는 90년대 음악적 출발점이 된 것이다. 혼자 풀 뜯지 않으면 작곡 할수없어
작곡가는 끊임없이 실험을 해야 해
지금은 실험생각조차 제거된 시대 한 사실 뉴욕 가서 완전히 음악과 단절했어. 하루 10시간씩 일해 기타 사고 연습실 빌려 5달러 받는 생활을 2년 이상 못 버티겠더라고. 동시에 한국에 있는 모든 커넥션, 관계도 끊었지. 그런데 1997년 일본 후쿠오카 공연부터 한국에서 매년 공연하다 음악도 계속할 기회를 얻었어. 90년대 인디신, 좋았지. 어어부밴드, 크래쉬, 블랙 신드롬, 황신혜밴드… 좋았는데 훌렁 타버렸지. 나 너무 슬퍼. 그래 가지고 아이돌 그룹이 잡았지. 너는 에스엠(SM)이냐 나는 와이지(YG)다 하는 지금 음악은 완전히 독재야. 강 이 땅에서 한대수는 14년을 사라졌다가 1989년 3집 <무한대>낼 때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갈수록 점점 아방가르드해져 당황했다. 한대수 귀국 직전 김민기 선배와 학전에 앉아 소주를 마시다가 한대수는 무세중 같은 전위예술가가 되려나 보다 했더니 ‘네가 한대수에 대해 뭘 안다고’ 하면서 몹시 역정을 내시더라. 한 하하, 나 미국에서 무세중씨 만났어. 4집, 5집에서 좀 전위예술가로 갔어. 정확한 말씀이야. 그런데 작곡가는 실험을 해야 해. 계속 ‘행복의 나라’만 할 수는 없는 거야. 성공한 케이스가 없지만 실험할 필요가 있어. 그런데 대부분 강헌씨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 야, 너무 가버렸어. 지금은 그런 실험을 할 생각조차 제거된 시대야. 소셜펀딩 통해 데뷔 40돌 기념음반
전인권 등이 그의 곡 10곡 리메이크
25~26일 LG아트센터에서 콘서트도
2000년 8집 <소로우> 녹음 모습.
강헌이 말하는 한대수의 ‘멀고 먼 길’
자유 : 위험하고 아름다웠던 충동
<멀고 먼 길>부터 <무한대>까지(1974~1989년) 한대수 1~3집은 한국대중음악의 역사적인 명반이다. 자유를 모르는 사회에게 자유를 충동했다. 불온하고 위험하고 아름답다. 1집 <멀고 먼 길>이 전량 폐기된 것은 유신시대 거대한 분서갱유의 시작이었다.
전위 : 정착할 수 없는 정신적 유목민
<기억상실>에서 <욕망>의 시기(1990~2006년) 4집, 5집은 전위적인 음반이다. 다시 새로운 한국생활을 시작한 8집부턴 영원히 정착할 수 없는 정신적인 유목민으로서의 한대수의 스펙트럼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12집 <욕망>이 눈에 띈다. 상업적인 이윤동기가 지배하는 대중음악시장에서 뚝심있게 자신의 음악적 자유를 주장하는 기념비적인 음반이다.
다시 자유 : 한대수의 재탄생
<한대수 리버스>(2015년) 이번 앨범에서 한대수는 ‘아이 서렌더’ ‘마이러브’라는 곡들을 불렀다. 80년대 이전 스타일인데 ‘컨템퍼러리 한대수’가 아니라 ‘레트로 한대수’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곡이다. 전인권 밴드는 음악사적 비극을 담고 있는 ‘자유의 길’을 새롭게 창조했다. 보기드문 리메이크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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