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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춥고 배고픈 일…서로 말리던 부자 3대 나란히 출사도”

등록 2015-11-12 21:39

사진가 임정의씨. 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사진가 임정의씨. 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짬] ‘4대의 사진전’ 연 사진가 임정의씨
4대째 업을 이어가고 있는 보기 드문 사진가 집안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안의 임씨’ 4대의 사진전 ‘대대로-빅 플로(Big Flow)’전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제이(J)’에서 12월9일까지 열린다.

11일 전시장에서 임정의(70)씨를 만나 사진가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 그리고 아들의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임정의씨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작은할아버지인 임석제(1918~1994)씨는 형식미가 주류를 이루던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벌써 탄광, 제련소, 부두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인 임인식(1920~1998)씨는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전의 소중한 기록을 대거 남겼고 한국 최초의 보도사진 통신사인 ‘대한사진통신사’를 만들었다. 임정의씨는 1970년대에 신문사 사진기자로 시작해 1975년부터 건축잡지 <공간>의 사진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청암사진연구소 대표로 40년 넘게 건축사진에 매진하고 있다. 아들 임준영(39)씨는 미국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SVA)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건축사진가로 일하고 있다.

작은할아버지 임석제 다큐 사진 ‘개척’
선친 임인식 한국전쟁 종군사진 활약
자신도 신문기자 거쳐 건축사진 매진
아들 준영은 만류에도 불쑥 사진유학

‘대대로-빅 플로’ 며느리가 전시 디자인
“아들 작품 예술적이어서 인기 높다”

-임석제 선생은 한국 사진 초기 다큐멘터리의 반석을 놓은 분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엔 리얼리즘에서 물러서서 ‘산’ 사진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어떤 것인가? 아버지 임인식 선생과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작은할아버님은 안의 임씨 20대손으로 그 집의 막내아들이셨고 선친은 장남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두 살 차이밖에 안 났으니 선친께 작은할아버지는 작은형님뻘이었을 것이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다. 할아버님이 북한산을 촬영할 때 삼각대를 들고 조수 삼아 따라갔던 기억이 있다. 하얀 양복에 금테 안경을 쓰고 파이프를 문 멋쟁이셨다. 할아버님은 (알려진 것처럼) 해방 무렵에 이미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진을 했으니, 따지자면 이데올로기의 기준에서 왼쪽이었다. 한국전쟁이 나자 당신의 사진세계도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선친은 당시 육사를 나온 분이니 실세였고 엘리트였으며 이념적으로 오른쪽이었다. 사진은 할아버님께서 더 앞섰고 선구자였으나 전쟁을 거치면서 상황이 역전된 거다. 선친께서 만든 ‘대한사진통신사’에서 할아버님도 기자로 일하면서 산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녔다. 두 분 모두 자존심이 셌다.”

-전시는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

“아들(임준영)과 이야기하다가 ‘4대’ 전시를 하기로 했고 며느리가 전시 디자인을 맡았다. 아버님은 (나에게) 사진을 못 하게 했다. 피는 못 속였는지 <코리아 헤럴드>에서 사진기자를 하고 있었다. 당시 한대수씨가 헤럴드의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는데 나랑 친했다. 이 친구가 영어도 잘했고 나중에 가수로도 활동하더구먼. 어쨌든 한대수씨가 1975년 ‘광복 30주년 기념 종합전시관’ 사진작업을 나에게 소개해줬는데 큰 프로젝트였다. 종합전시관의 모든 총괄업무를 대표하는 회장이 김종필 국무총리였고 김수근 건축가가 부회장이었다. 이 작업을 계기로 인정을 받아 건축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확히 말하면 건축사진이었는데 이상하게 ‘임인식의 아들이 건축을 한다더라’라고 알려지는 바람에 나에게 건축설계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다. 하하.”

-이번 전시의 구성을 보니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이 모두 풍경 위주다.

“전시 구성의 개념을 그렇게 엮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전 이후로 다큐멘터리에서 발을 멀리하게 된 할아버님은 아버님이 만든 대한사진통신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외국인을 위한 화보집 촬영을 주로 하게 되었으니 풍경이 많고 아버님도 그렇다. 내 사진은 건축사진을 위해 전국을 답사하다가 찍은 풍경들이다. 건축사진은 ‘드라이’했지만 ‘한국의 아침’에 눈을 뜨면서 풍경을 많이 찍고 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아들의 건축사진이라고 봐야 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크게 걸린 것은 아들 준영씨의 사진들이다. 준영씨는 ‘라이크 워터’ 연작을 걸었는데 건축물 사진에 물의 흐름을 ‘메이킹’으로 표현했다. 임씨는 “나와 달리 아들의 사진은 예술적으로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준영씨는 사진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

“말리는 것도 대물림인 모양이다. 나도 당연히 건축사진은 춥고 배고프니 하지 말라고 말렸다. 아버님과 나는 돈거래를 정확히 했다. 형편이 어려울 때면 아버님께 돈을 빌렸으나 1년 후에 원금은 반드시 갚아야 했다. 내 이름을 정의(正義)라고 지었으니 오죽하셨겠나. 준영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 아버님의 필름을 인화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켰다. 하루에 스무장 정도 인화작업을 쭉 하더니 어느새 사진의 구성 같은 것을 혼자 배웠나 보다. 그러더니 불쑥 혼자 챙겨 유학을 가더라.”

-4대가 한꺼번에 사진 찍으러 다닌 적이 있었나?

“할아버님과 아버님은 나이 차이도 두 살인데다 서로 주관이 달라서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라이벌 관계였다. 같이 다니지 않으셨다. 아버지와 나와 준영이는 온양이나 마산 등지로 자주 건축 답사하러 다녔다.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는데 셋이 서로 달랐다. 아버님은 현장을 중시하여 기록처럼 찍었고 나는 실무적이랄까…. 아들은 아직 어려서 사진이라고 하기엔….”

-앞으로 4대에 걸친 사진작업을 정리할 계획이 있는지?

“(임석제 할아버님의 직계인) 사촌 쪽엔 사진 하는 분이 없다. 그분들과 상의할 일이지만 발굴할 사진이 많다. 많이 분실하기도 했다. 아버님의 사진은 해방 이후 북촌, 가회동 쪽 사진들을 정리할 생각이다. 내 사진도 해나가야 하고 이번 전시 개막과 때를 맞춰 <임정의 포토그라피 1>을 냈다. 김중업, 김수근 선생의 건축사진집도 해야 한다. 아들이 도와주겠지만 결국 내가 마무리해야 한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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