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과 갑판에 팔딱이는 고등어떼. 무대 표현을 위해 공으로 은유했다. 사진 국립극단 제공
리뷰 l 국립극단 연극 ‘고등어’
횟집 수조같은 갑갑한 교실 떠나
고등어잡이 배에 탄 여중생 2명
2천마리 고등어가 쏟아져내리자…
횟집 수조같은 갑갑한 교실 떠나
고등어잡이 배에 탄 여중생 2명
2천마리 고등어가 쏟아져내리자…
2000마리의 고등어가 천장에서 쏟아졌다. 통영과 제주도 사이 185번 해구에서 잡혔다. 가로 8m, 세로 6m의 그물에 고등어가 펄떡거렸다. 그물을 뛰쳐나간 고등어는 가로 17m, 세로 6m의 배 갑판 위에서 파드득거렸다. 압권이다. 그런데 이곳은 무대다. 진짜 고등어를 올리지 못하고 탁구공과 볼풀 공으로 고등어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2000마리의 고등어가 수직 낙하하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울화통과 억압이 순식간에 뻥 뚫렸다. 심장이 팔딱이는 해방감이다. 지난 19일 막 올린 ‘국립극단 청소년극 릴-레이’의 첫번째 연극 <고등어>다. 연극배우인 배소현이 대본을 쓰고, 2014년 서울문화재단 ‘뉴스테이지’에서 <날개, 돋다>로 청소년극의 가능성을 연 이래은이 연출을 맡았다.
여기 열다섯살의 두 소녀가 있다. 지호(정지윤 분)와 경주(정새별 분)다. 흔히 ‘중2병’으로 통하는 나이. 사춘기의 주체못할 성장통과 억압적 주변환경에 짓눌리고 한편으로는 반항한다. 두 소녀는 횟집 수조 같은 교실을 탈출해 경남 통영 삼덕항으로 향한다. 경주는 학교에서 수조에 갇힌 고등어처럼 늘 잠만 잤다. 그래서 둘은 직접 고등어잡이 배를 타기로 한다. 제주와 통영 중간쯤 바다에서 고등어떼를 만난다.
그때 그물에서 쏟아지는 수천마리의 고등어를 만났다. 두 소녀의 가슴 위로 2000마리의 고등어가 쏟아지자, 순식간에 깨달음이 밀려왔다. 가슴이 뻥 뚫리는 깨달음은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닮았다. 비록 어린 소녀들이지만, 단박에 깨쳐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경지.
두 소녀는 배에서 갓 잡은 고등어의 회 맛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살며 힘들 때마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 되새김질한다. 연극에서 경주는 지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고등어 회 또 먹고 싶다, 팔딱팔딱!” 찌릿찌릿, 척추를 타고 전해지는 여운을 느끼며 파드득! “뱃속에서 고등어가 팔딱거리는 것 같아!” 열다섯 소녀가 깨친 한 번의 해방감은 앞으로 이들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말하자면 돈오점수((頓悟漸修)다. 문득 깨친 뒤에도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필요하다는 의미.
고등어의 수직낙하 장면과 함께 놓칠 수 없는 장면은 깨진 화분에서 다시 식물이 자라나는 장면이다. 아무리 깨진 삶이라도 생명은 끈질기게 자기 생을 이어간다는 것.
<고등어> 제작의 협력학교 성남 숭신여중 연극반 2·3학년 학생들은 “공연이 끝나면 희곡의 세계는 끝나지만, 지호와 경주의 이야기는 고등어 회 한 조각처럼 공연을 본 소녀들의 몸속 어딘가에 머무르겠지요”라는 후기를 남겼다. 어디 청소년들뿐일까. 어른들을 위한 드라마로도 손색이 없다. 이달 29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 1644-2003.
손준현 기자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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