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무대가 가습기 살균제, 4대강 오염 등 사회 현안 논쟁의 장으로 변했다. 지난 26일 서울 엘지아트센터에서 막 오른 독일 ‘샤우뷔네 베를린 극장’의 <민중의 적>은 극적 재미와 우리 현실을 돌아보는 독특한 관람 경험을 선사했다. 엘지아트센터 제공
이곳이 연극무대 맞나요? 혹시 토론회장 아닌가요? 극장이 정치·사회현안 논쟁의 장으로 변했다. 가습기 살균제, 4대강 오염에서부터 ‘진실에 침묵하는 개인’까지 다양하게 토론은 이어졌다.
지난 26일 저녁 서울 강남구 엘지아트센터, 독일 ‘샤우뷔네 베를린 극장’의 <민중의 적>이 막을 올렸다. 온천수 오염 문제를 폭로하려는 스토크만 박사와 이를 막으려는 권력·언론과의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 입센의 원작을 오스터마이어 연출이 ‘지금 여기’ 문제로 현대화했다. <민중의 적>은 관객을 극중 토론에 참여시켜 현실을 환기시키는 연출 기법으로 유명하다.
먼저 ‘개발이익이냐, 시민의 생명이냐’를 둔 극 중 배역들 간 설전이 무대를 달궜다. 스토크만의 시청 앞 연설은 <민중의 적>의 클라이맥스다. 그는 “온천수 오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권력과 언론의) 정치적 공조 사회로 오염됐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우리를 통제가능 하도록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어 돌연 한 출연자가 “의견 있는 관객은 손을 들라”는 대사를 던지면서, 연극은 관객을 직접 토론으로 끌어들였다.
관객들의 호응이 이어졌다. 관객들의 발언은 연극 속 주장에 대한 찬반 진술을 넘어,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의견 개진으로 확대됐다. 한 여성 관객은 “수질 문제라면 4대강 오염 문제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옥시 사태는 정부가 몇 번이 바뀌도록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며 “나라 전체가 엉망진창이다. 이건 연극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한 남성 관객은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인데, 수질오염 보고서를 왜 공개하지 않나”라고 신문사 사장 역의 배우를 추궁했다. 배우가 “언론 사장으로서 여러분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없었다”라고 회피하자 야유가 쏟아졌다. 한 30대 남성은 “거대악이 청와대나 국회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깨어있지 않은 대중에게 문제가 있다”라고 했다. 그러자 배우는 “그럼 투표하러 가시라. 그냥 정당 하나 만들라”라고 받아쳤다. 연극 속 대립 구도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함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연극은 검정색 거대한 칠판 앞에 놓인 책상과 의자들이 소품의 전부지만, 극과 현실을 넘나드는 구성으로 팽팽한 긴장감과 극적 재미를 선사한다. 온천의 주식을 ‘본의 아니게’ 갖게 된 스토크만 박사 부부가 서로 마주보는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진실을 위해 싸울 것인지, 주식의 이익을 지킬 것인지 시험에 든 이들의 처지는 곧 한국사회 ‘우리’의 상황과 다를 것이 없다. 이날 공연을 본 정진세 연출은 “시각적인 장치가 없으면서도 한국 현실과 토론이 결부되면서 이야기가 잘 흘러갔다”며 “관객들이 극적 재미 속에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독특한 관람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8일까지.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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