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 워크: 김작가 대 조작가’에 나온 조해준 작가의 ‘미군과 아버지 초상-운전기사 흑인 일병’. 카투사 출신의 작가 부친이 과거 함께 일한 미군들의 기억을 살려 그린 초상 드로잉에 미군부대 앞 현직 초상화가가 채색해 완성한 작품이다. 함께 나온 김병관 작가의 밀리터리룩 그림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카운터 워크: 김작가 대 조작가’에 나온 김병관 작가의 밀리터리룩 그림. 전시장에 함께 나온 조해준 작가의 지난 시절 미군 초상과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서울 창신동 봉제공장촌 깊숙한 골목에 ‘지금 여기’란 청년 전시 공간이 있다. 서울 동대문역 출구를 나와 북쪽 급경사 길을 한참 올라가야 나오는 곳이다. 폭염에 가볼 엄두가 쉬 나지 않는 달동네 반지하 공간이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지금 청년작가들이 피부로 느끼는 시대와 세상에 대한 감각을 읽을 수 있는 전시가 기다린다. 안성석 작가와 니콜라스 펠처의 2인전 ‘휴먼동굴’(21일까지)이다. 벽 곳곳에 허접하게 붙인 합판들의 얼룩 같은 결들과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여러 개의 엽서꽂이 회전대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회전대에 꽂힌 우중충한 색감의 디지털 이미지 사진들은 야릇한 몰입감을 일으킨다. 디지털 시대 작가들을 둘러싼 네트워크 현실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고립감, 권태감, 원시성 등의 감정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위작 파문이 휩쓸고 간 8월 미술판 한구석에는 ‘지금 여기’처럼 폭염보다 뜨거운 젊은 미술가들의 전시판이 꿈틀거리고 있다. 시장과 제도권 평단이 거의 주목하지 않지만, 시대와 현실의 미세한 징후를 좇는 그들의 작가의식과 상상력은 화랑가,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힘과 신선함으로 번득거린다. 최근 청년미술가들 사이에 화제가 된 몇몇 전시들을 소개한다.
서울 연지동 두산갤러리의 ‘사진, 다섯 개의 방’전(27일까지)은 올해 국내 사진전 가운데 실험성이 가장 도드라진 마당이라 할 만하다. 최근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작업해온 소장사진가 김도균, 김태동, 백승우, 장태원, 정희승씨에게 크지 않은 방을 각각 만들어주고 자기 세계를 압축적으로 연출하도록 한 얼개다. 백색의 진료실 같은 공간을 만들고 일상사물의 조형성을 포착한 사진들로 덮인 탁자와 의자를 비치한 김도균 작가, 자신이 벌인 주요 기획전 제목을 새긴 기념명패들을 벽에 떡하니 붙여넣고 비평글을 주위에 텍스트로 붙인 백승우 작가, 풍경 인물 사진의 그림자 부분을 뜯어내면서 사진의 구성틀을 해체해버린 장태원씨 등의 공간이 인상적이다. 출품작가들이 한국과 세계 사진의 역사에서 어떤 계보에 해당하는지를 각 전시장 입구 벽마다 도표로 그려놓은 구성도 눈에 들어온다.
지난 시절의 주한미군 초상과 미군 군복 패션(밀리터리룩)으로 치장한 모델을 대비시키는 인물그림전도 손짓한다. 서울 연희동 살롱아터테인의 조해준·김병관 작가 2인전 ‘카운터 워크’(23일까지)다. 50년대 카투사였던 부친이 그 시절 기억을 살려 그린 주한미군 장교 사병들의 어눌한 드로잉에 현직 미군부대 초상화가가 채색을 하고 작가는 이런 작업들을 지시하는 프로듀서 역할을 맡은 조 작가의 미군 초상 그림들은 독특한 개념적 구도가 흥미롭다. 반면, 김 작가는 서구의 군복 패션 아이콘을 잡지 등에서 따온 모델들의 자태에 짜깁기해 그려넣고 다시 붓질해 해체하는 작업으로 조 작가의 아마추어적 화풍과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한국 미술판의 양극단적 감수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획이다.
청년미술인 사이에 그림 잘 그리는 실력파로 소문난 안지산 작가는 서울 합정동 전시공간 합정지구에 ‘전단지’란 제목의 개인전(27일까지)을 차려놓았다. 현대미술에서 위세를 잃어가는 정통회화의 위기감을 주택가 벽에 붙였다가 뜯기거나 떨어져나가는 전단지의 미세한 흔적들로 화폭에 드러내는 작업들이다. 거친 화면을 붓과 나이프로 덧칠하고 지우는 축적의 과정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밀도감 높은 회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필력의 기본기를 바탕으로 그림의 형식, 소재의 속성 등에 대해 치열한 성찰과 탐구를 펼쳐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각 전시장 제공
안지산 작가의 유화 ‘발끝으로 서다’(2016). 전시공간 합정지구의 개인전에 나온 작품이다.
장태원 작가의 설치작품 ‘나이든 여인(An old lady)’(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