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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장이 ‘화백’에 만족못한 이들의 중심엔 늘 선배가 있었죠”

등록 2016-08-24 19:03수정 2016-08-24 20:13

만화가 ‘바보 백무현’을 떠나보내며
고 백무현 만화가.
고 백무현 만화가.

기억하십니까.

90년대 중반 쯤 어느 여름이었을 겁니다. 객기만 충만했던 ‘광주만화공방’ 후배들이 당시 <광주매일신문>에 만평가로 내려온 선배와 처음 만난 날 말입니다. 단정한 선비 같았던 선배의 첫인상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한겨레> 만화초대석 코너에서만 보던 선배의 만평을 광주 지역신문에서 날마다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고 언제든 거리낌 없이 술을 사주던 다정다감한 선배가 생겨서 감사할 따름이었지요.

선배와 인연이 얼마 안 된 어느날 선배는 두툼한 원고 뭉치를 가져왔습니다. 빽빽한 손글씨로 스크립트한 ‘현대사’ 만화 초고였지요. 그렇게 무모하게 우리는 3권짜리 만화 현대사 작업에 돌입했고 어설프나마 책으로 묶어나왔어요.

선배는 만평을 그릴 때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치장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단순하되 명쾌하게 표현된 만평이 잘 된 만평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재미를 위해 익살은 덤이라고요. 힘을 빼라. 어렵게 그리지 마라. 구질구질한 설명은 기사에 맡기고 주의주장은 사설에 양보해라. 만평에서 모든 걸 설명하려고 하지 마라. 이것이 선배의 지론이었습니다. 그렇게 얼치기 후배였던 저는 선배의 코치를 받아가며 촌티를 벗고 만평가로서 입문을 하고 선배는 다시 <서울신문>으로 떠납니다. 아이엠에프 사태가 터지고 세상이 폭풍처럼 어디론가 휩쓸려 변해가던 시기였지요.

선배, 돌이켜보면 그때는 우리 모두 조금씩 미쳐있었습니다. 2001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우리 젊은 만평가들이 모여들어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현 시사만화협회)’를 결성할 때도, 몇 년 뒤 선배가 회장이던 때 ‘뉴스툰’이라는 시사만화 사이트가 개설됐을 때도 그랬습니다. 비겁한 언론의 모습을 자기비판한 만화모음집을 낼 때도 그랬고 광화문 세종로에서 팻말을 들고 뛰쳐나가 ‘미선·효순이를 살려내라’고 외칠 때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문사 화백이랍시고 사내정치나 하면서 봉급 받는 것에 도무지 만족을 못하고 있었지요. ‘화백’이 싫었지요. 우린 젊었고 뭔가 화끈한 어떤 ‘사고’를 치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선배가 있었고 또 제일 선두에서 마파람을 맞으며 깃발을 들던 사람도 선배였습니다.

선배, 우리가 나이만큼이나 영혼도 늙어 길가에 주저앉아 있을 무렵, 선배는 신문사 만평가라는 명함을 내던지고 여전히 홀로 앞으로만 달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선배가 비틀거릴 때 정작 우리는 뒤에 멀리 있었습니다. 더딘 걸음으로 뒤쫓아 선배를 불렀을 때 선배는 이미 장작처럼 마른 초라한 육신으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보 노무현’을 그리던 ‘바보 백무현’은 갔습니다.

선배, 그럼에도 이 배은망덕한 후배는 여전히 선배의 영혼이 곁에 있어주길 원합니다. 험한 이 세상에서, 위태로운 언론판에서, 무사히 건필하게 해달라고. 양심을 갉아먹는 위선과 귀를 간질이는 비겁을 씻어달라고. 유혹을 물리쳐 달라고. 끝까지 싸우게 해달라고.

선배, 선배가 ‘만화 노무현’을 그렸던 책상에 펼쳐놓은 책과 자료에 이제 슬슬 먼지가 쌓이기 시작합니다. 언제라도 이 자리의 먼지를 털고 선배 유품을 정리해야겠지만 저는 주저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거짓말처럼 선배가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와 이렇게 말할 것 같아서요. ‘어허 이 사람아, 그대로 놔두소. 아직 마감 안 끝났어.’

설인호/<금강일보> 화백, 전국시사만화협회 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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