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비극을 응시하며 동시대로 열린 눈과 귀, 날 선 문제의식이 빚어내는 꼼꼼한 고증과 탐문. 김은성은 벅찬 동시대와 맞서 싸우는 ‘극작 전사’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서울 광화문과 대학로 사이, 한국 현대사는 아직 거친 숨을 몰아쉰다. 광화문광장에선 900일이 넘도록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외침이 이어지고, 대학로 서울대병원에선 고 백남기씨를 두번 죽이는 ‘1980년대식 참사’가 되풀이된다. 광화문과 대학로에서 동시에 화제의 신작 연극을 올리는 작가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 개인의 실존적 고민이라는 동시대의 두 과제와 끊임없이 싸워온 ‘극작 전사’ 김은성(39)이다. 작품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16일까지 공연하는 <함익>(서울시극단·김광보 연출)과 대학로 가는 길 두산아트센터에서 22일까지 올리는 <썬샤인의 전사들>(달나라동백꽃·부새롬 연출)이다.
<썬샤인의 전사들>은 소년병의 수첩을 매개로 그린 ‘한국 현대사의 벽화’다. 15살 카투사 나선호가 남긴 수첩을 따라 한라산에서 숨진 명이, 장진호에서 숨진 순이, 만주 위안소의 막이, 조선족 중공군 호룡, 인민군 군의관 시자 등이 줄줄이 호명된다. 여기에 ‘케이타워 참사’로 아내와 딸을 잃은 작가 한승우가 화자로 등장해, 수첩 인물들과 스승인 송시춘 작가, 1980년대 공안사건 조작에 동원된 작가 자신 한대길을 씨줄 날줄로 엮는다. 세월호를 비유한 참사는 수첩 속 현대사가 아직도 비극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김은성이 쓴 <썬샤인의 전사들>은 소년병의 수첩을 매개로 그린 ‘한국 현대사의 벽화’다. 한라산에서 숨진 명이, 장진호에서 숨진 순이, 만주 위안소의 막이, 조선족 중공군 호룡, 인민군 군의관 시자, 양심을 지킨 작가 시춘, 참사로 숨진 봄이 등이 줄줄이 호명된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2013년 이후 영국 트래버스극장과 워크숍을 하면서 중공군과 영국군이 임진강에서 만나는 작품을 구상한 적이 있어요.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한반도를 짚어보자는 기획이었습니다.”
김은성의 ‘세계사적 구상’은 곧 어그러졌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 배부른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장 숨넘어가는 상황에서….” 극작은 물길을 돌렸다. “영국군은 소년병으로, 중공군은 조선족 출신 중공군으로 바꿨어요. 역사의 힘을 역설적으로 그걸 은폐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알게 됐습니다. 영화·드라마로 많이 본 한국전쟁 얘기를 다시 해야겠다고 봤습니다.”
“전쟁기념관을 자주 갔는데, 시레이션 박스를 표지 삼고 갱지를 오려 군화 끈으로 묶은 수첩을 보고는 ‘아! 수첩 한 권으로 아슬아슬하게 현대사를 이어가보자’ 하는 구상을 했어요.” 그는 2014년에도 <뺑뺑뺑>을 통해 양민학살, 강제징용, 월남파병, 고공농성 등 반복되는 현대사의 비극을 다뤘다.
김은성은 <썬샤인의 전사들>의 제목을 한때 ‘작가들’로 생각했다. 주인공 한승우 작가와 스승 송시춘 작가, 공안사건 조작에 동원돼 송 작가의 대본을 ‘용공물’로 고쳐 쓴 한대길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대길이 국가권력에 억압받는 작가의 상징이라면, 1억원에 자서전 대필을 의뢰받는 한승우는 자본권력에 굴종하는 작가의 상징. 두 뒤틀린 작가상은 야학에서 배운 한글로 작가를 꿈꾼 15살 소년병의 순수함, 목숨을 걸고 양심을 지킨 송 작가의 강단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곡필(曲筆)과 매문(賣文)의 시대, 작가란 무엇인가. 김은성의 질문이다.
12세기 덴마크 왕자 햄릿을 21세기 재벌가 여교수로 불러온 <함익>에서 김은성은 현대인의 근원적인 고독을 그려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현대사의 비극과 작가의 실존적 고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이어진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햄릿을 바탕으로 창작한 <함익>이다. 김은성은 12세기 덴마크 왕자 햄릿을 21세기 재벌가의 교수로 성전환시켜 불러왔다. 햄릿의 고독한 심리와 섬세한 여성성에 주목한 이 작품의 주제는 한 대사로 요약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야.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그것이 문제야.” 곧 ‘삶다운 삶을 살 것인가 죽음 같은 삶을 살 것인가’라는 실존적 고민이다. 김은성은 “함익은 자기 것이 없고 공허한 존재. 사랑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함익> 이전에도 김은성은 고전의 한국적 재해석으로 호평을 받았다. <달나라 연속극>(테네시 윌리엄스 <유리동물원>), <로풍찬 유랑극단>(류보미르 시모비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순우삼촌>(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 등이다.
현대사의 비극을 응시하며 동시대로 열린 눈과 귀, 날 선 문제의식이 빚어내는 꼼꼼한 고증과 탐문. 김은성은 동시대와 싸우는 ‘극작 전사’다. <썬샤인의 전사들>에서 반성 없는 역사와 싸우는 ‘전사’요, <함익>에서 “햄릿은 인간의 목소리로 신의 노래를 부르는 고독한 전사”라고 외치는 ‘전사’다.
지난 9월30일 <함익> 첫 공연날 그를 만났다. 깨끗이 민 머리와 뿔테 안경 속 반짝이는 눈. “오늘 제가 왜 이렇게 말이 안 되죠?” 작품에서 할 말이 많던 작가는 겸연쩍게 웃었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세종문화회관·두산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