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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내면에 목소리를 듣다

등록 2016-12-16 19:17수정 2016-12-16 20:38

[토요판] 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가시나무   작사·곡 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한국 싱어송 라이터의 계보에서 누락시킬 수 없는 뮤지션 중의 한 사람이 하덕규다. 그가 꾸리던 그룹 시인과 촌장의 1집 <시인과 촌장>이 발매된 것은 1981년이다. 당시 시인과 촌장은 하덕규와 오종수의 듀엣이었다. 그 후 당대의 가장 중요한 모음집이라 할 수 있는 <우리 노래 전시회> 1집(1984)에 ‘비둘기에게’가 실림으로써 대중의 귓전에 다가온 시인과 촌장은 하덕규와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듀엣으로 라인업을 재정비한 뒤 1986년에 그들의 대표작이라 할 기념비적인 2집 <푸른 돛>을 발매한다. 6월항쟁이 나라를 한번 들었다 내려놓은 후, 1988년에는 3집 <숲>이 발매되는데, 2집이 일상적인 스케치에 가깝다면 3집은 내면일기에 가깝다. 이 앨범들에서 하덕규의 음악적 전망은 거의 완성 단계에 놓인다고 해도 좋다.

한마디로 그는 광장의 시대인 1980년대에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다. 세상은 시끄러웠다. 독재자의 폭력이 서슬 퍼렇게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쳐서 우는 날보다 최루탄 연기가 매워서 눈물을 흘리는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처럼 겁 많은 보통 학생들의 마음은 11월처럼 스산했다. 분신한 선배들이 있었고 공포와 죄의식이 내면을 짓눌렀다. 분신한 열사들의 장례식을 뒤덮은 검은 만장이 5월의 하늘 아래 펄럭일 때 분노와 결의가 다져졌다. 그와 동시에 알 길 없는 허망함 같은 것이 만장 사이로 둥실 떠 있던 구름처럼 장례식장 전체를 휘감았던 것도 사실이다. 내면의 목소리는 복잡해져갔다. 갈등과 고민이 가슴속 어느 구석방에 낙엽처럼 쌓였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가 마음의 문 밖으로 터져 나와 떵떵 울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가냘펐다. 내면의 일기장에는 그런 여린 절규가 기록되었지만 그 절규가 외부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젊은 내면에는 많은 방들이 있었고, 대개의 방에는 약간은 병든 자아가 숨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나’였다. 세상 밖으로 나오는 나는 내 속에 있는 그 ‘너무도 많’은 나의 작은 일부였다. 때는 역사적으로 그런 때였다. 나의 일부가 투영된 광장의 연대가 굳건해지는 동안 남한의 자본주의는 발전해갔고 내 속에는 더 많은 내가 다층의 내면을 형성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사상과 이념을 따랐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소비했다. 욕망과 당위가 내 안에 겹을 이루며 한편으로는 나를 유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채찍질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때로 사랑하는 사람은 동지였고, 때로는 엄밀히 말하면 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전선이 일상 속에 그려졌다. 기억한다. 파리하고 예쁘장한 얼굴의 과 선배는 시위가 벌어지는 날은 더 일찍 교문을 나서곤 했다. 누구도 대놓고 뭐라 하진 않았던 것은, 그 선배의 마음 안에도 수많은 방들이 있고 그 안에서 서로 싸우는 수많은 내가 ‘너무도 많’았던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1980년대에 우리가 겪은 내면은 비슷했다. 마음의 밖에는 당신이 쉴 곳도 있었겠지만 마음속에는 그 많은 ‘내’가 서로 싸우고 비난하느라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이를 테면 ‘당신’을 위해서 싸우던 시대의 내면에 ‘당신’을 위한 자리가 없는 이런 역설이, 한 시대의 젊은이들을 고뇌하게 했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하덕규는 그 내면에서 들리는 작은 절규의 다성화음을 받아 적을 줄 아는 드문 가수였다. 그는 고통을 견딜 줄 안다. 아니, 그의 노래는 고통을 ‘생산’한다. 사람들이 ‘전망’을 생산할 때 그는 ‘고통’을 생산했다. 그 고통은 어디에서 오나. ‘어둠’과 ‘슬픔’에서 온다. 그는 내 속의 ‘나’를 지배하는 두 요소를 ‘어둠’과 ‘슬픔’으로 요약한다. 어둠은 내가 어쩔 수 없고 슬픔은 내가 이길 수 없다. 어둠과 슬픔은 언제나 쌍으로 존재한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전망에 관심을 쏟던 1980년대였다.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절박했다. 금지된 광장에서는 미래의 희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둠과 슬픔은 말없이 부대끼는 나뭇가지들이 무성한 방, 내면의 몫이었다. 젊은이들이 사과탄에, 백골단에 쫓겨다녔다. 해가 지면 교문 앞의 싸움은 사과탄 파편과 깨진 보도블록을 남기고 일시중단되었다. 달려간 친구는 며칠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고 선배들은 걱정하며 그 아이가 어느 서에 있는지 알아보았다. 젊은이들은 교문을 지나쳐 지하의 주점으로 흘러들곤 했다. 막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취기만이 남았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자주 울던 어떤 선배를 기억한다. 그는 만취 상태에서 울었고, 주위에 있던 동료나 후배들도 괜히 같이 따라 울곤 했다. 사실 그 울음에는 정확한 이유가 없었다. 그 선배는 참 노래를 잘했다. 그가 큰 눈망울을 반짝이며 노래할 때 여자 후배들이 그 눈빛을 바라보곤 했다. 왠지 그 눈망울에는 아픔이 없지 않았다. 그 선배의 이념적 박약함을 비판하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 비판은 정당한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 선배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지하의 주점에서 우리는 많은 노래를 불렀다. 레퍼토리는 뽕짝에서 민중가요까지 다양했다. 왜 그렇게 노래를 많이 불렀을까. 노래하면 조금 나아졌다. 차이들은 살짝 지워졌고 낮에 엔엘(NL)이다, 시에이(CA)다, 논쟁하던 선배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이 처이, 무릎을 치며 함께 노래했다.

몇 학년 때였더라, 엠티(MT)를 갔는데, 꺼진 모닥불가에서 밤새 기타를 쳐본 적이 있다. 산은 검게 다가왔고 기타는 점차 울먹였다. 잠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몸짓들로 뒤척이며 누군가를 불렀다. 하덕규는 어쩌면 그런 목소리를 대변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래서 내면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한 성향은 나중에 종교적인 추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시인·뮤지션·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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